BASEBALLPARK

어제 커피를 마시며 베팍질을 하다가 우연히 음악 하나를 듣고 잊었던 기억이 떠올랐다.

어떤 노래를 듣다보면 반드시 어떤 얼굴이 떠오르는 그런 노래가 있게 마련이다.



어제 신형원의 '커피향 가득한 거리'를 듣다보니 그 아이가 생각났다.


내가 대학교 2학년때 동아리 1년 후배 여자 아이.

신입생 환영회때 선배들의 강권에 못이겨 그 아이가 자리에 일어나서 무반주로 불렀던 노래

수줍은 듯 떨리면서 청아한 목소리로 불렀던 그 노래


"커피향 가득한 거리 벤취에서 해가지는 저녁 보낸 기억 있나요~~

 풀내음 가득한 들녁 언덕에서 쏟아지는 비를 맞은 기억 있나요~~

 낯익은 아픔은 밤이 깊을수록 더하지만 밤은 새롭기만 해요

 낯익은 아픔은 비가 내릴수록 더하지만 비는 새롭기만 해요 "



특유의 사근사근하고 누구에게나 친절하고 아무하고나 스스럼없이 잘 어울리는 성격이 있다.

그 아이는 들어오자마자 동기 남자아이들의 중심에 섰고, 그 아이를 둘러싸고 남자 아이들의

수많은 암투가 있었다.



나도 약간은 끌리는 마음을 느꼈지만, 원래 성격이 혼탁한 개싸움을 즐기지 않는지라

일부러 신경을 끄려고 노력했다.  여학생을 두고 후배들과 경쟁하는것은 우스운 일이다.



그런데, 이 아이 좀 뜬금없다.


동기 남자애들끼리 가는 설악산 캠핑에 데려가 달라고 부탁을 해온다.

힘든 여행이었지만 같이 설악산을 다녀온후 참 많이 친해졌다.



그 이후 뜬금없이 전화를 해 오기도하고, 편지를 쓰기도 한다.

내 마음속에 어떤 확신이 느껴졌다.


"이 아이가 나를 좋아하고 있구나..."



그렇지만, 동기 남자애들에게 워낙 인기좋은 이 아이, 섣불리 다가갔다가는

후배들에게 그동안 쌓아온 고고한 이미지 다 무너진다. 모른척 거리를 유지하고

지켜볼 일이었다.



그렇게 그 계절이 지나갈즈음 나에게 느닷없이 입영영장이 날라왔다.

황당한 일이었다. 진작에 입영희망원을 내어 놓긴 했지만....

사람이 밀려서 몇 달 기다려야 한다고 그랬었는데.....당장 2주후에 입영을 하란다.



여러가지 생각이 주마등처럼 스쳐간다. 가장 억울한 일은 연애한번 제대로 못해보고...

특히나 편지 써 줄 여자친구 하나 만들어놓지 못하고 군대를 들어가려니 억울하고도 억울했다.

긴긴 군대생활 견디려면 편지라도 써주고 면회라도 와 줄 여자친구를 만들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바로 떠오르는 얼굴이 그 아이였다. 이 아이라면 내가 말만하면 넘어오리라 생각했다.

그래 이 아이정도면 괜찮다. 외모도 그럴듯하고 애교도 있고......



전화를 해서 만나자고 했다.

그 당시에는 지금의 일산 풍동 지역이 백마라고 해서 낭만어린 동네였었다.

신촌에서 기차를 타고 황량한 논밭을 지나 백마역에 내리면 아무것도 없는 허허벌판에

멋스럽게 꾸며진 카페가 몇 개 있었고.....그 당시엔 대학생들이 낭만을 찾아 기타를 둘러매고

황량한 이곳을 찾아오곤 하였다.



황토벽을 하고 한가운데에는 모닥불을 피워놓은 온화한 분위기의 카페 '화사랑'

그곳에서 차를 마시며, 술을 마시며 이런저런 이야기를 했다.


군대 입영통지서를 받았다고 이야기했다.


"몸 건강히 잘 다녀 오세요."




어라? 이게 끝인가?


대답이 너무 건조하고 짧다.



촤아식 의연한 척 하기는........




일단은 군대 이야기는 거기서 그만하고 이런저런 다른 이야기만 하면서 일부러 밝은 분위기를

만들려 애썼다.



다시 기차를 뒤집어타고 신촌에 도착하여 그 아이를 바래다주게 되었다.

그 아이의 집앞에서 승부를 걸어야겠다고 생각했다.



점점...다가오는 그 아이의 집 앞


마지막 인사를 해야 할 시간...



그 아이를 잡아 세우고 눈을 똑바로 바라보면서 말을 했다.


"나랑 사귈래?"



.........................





짜증섞인 대답이 되돌아왔다.


"뭐 어쩌라구요?  낼 모레 군대갈 사람이 할 말이예요?"






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








근데, 희안하게도 거절당해서 슬프다거나 마음이 아프다거나 한 그런 심리상태가 아니라....

쪽팔렸다. 길가다가 대로변에서 미끄러져서 웃음거리가 됐을 때의 그 기분....

내가 많이 좋아한게 아니라.....거절당한 자체가 심히 쪽팔렸던거구나...





훗날에 면회온 친구 녀석에게 듣게 된 후일담....





그 아이에게 그런식으로 편지를 받고 알게모르게 만나는 녀석이 나뿐 아니라 여러명 된다는 이야기....




아하?  이게 말로만 듣던 그 어장관리????




아하, 그랬던 것이었구나...나도 어장관리를 당했던 것이었구나



날쌘 내일망정 에헐질 뻔하괘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