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ASEBALLPARK

술을 마시고 있었다.
그날은 늦게 퇴근을 하고서 샤워를 하고 냉장고에서 맥주를 꺼냈던 참이었다.
컴퓨터를 부팅시키고 음악을 켜고는 느긋하게 재즈를 들으며 웹서핑을 하고 있었다. 침대옆에 pc, 장식장 위의 오디오. 그리고 거실에 보이는 tv. 이렇게 오롯하게 짜여진 시스템 안에서 캔맥주 하나를 들고 있으면 뭔가 만족스러운 기분이 들곤 한다.
요즘 잠이 좀 부족했던 탓인지 캔맥주 하나에도 피곤이 몰려왔고 나는 불을 끄고 음악을 켜놓은채 침대에 누웠다.


우리집은 비밀번호형 잠금식인데 비밀번호가 아주 간단하다. 자물쇠 업체에서 달아주면서 바꾸라고 했지만 귀찮아서 그냥 내버려뒀던 비밀번호었다. 그렇지만 특별히 문제가 생긴적은 없었는데 그날 밤은 좀 달랐다.


시간이 얼마나 지났을까....문득 희미한 의식이 들었을때 꿈을 꾸듯 잠결에 어디선가 울리는 나즈막한 여자의 목소리...더불어 빗소리까지 들려오고 있었다.
그 순간 꿈인지 생시인지 눈감은상태에서 잘 구분할 수가 없었다. 누군가 있는것일까?
잠이 들지도 깨지도 않은 몽롱한 상태에서 누군가 움직이는 듯한 작은 기척소리와 나즈막한 여자의 목소리가 들리는듯 했다.
그때 정확히 들리는 목소리..

그 여자, 몇개월전에 사귀었던 그 여자. 내가 아주 많이 좋아했던 그 여자. 늘 세련되고 자신만만하며 자신과 타인에 대해 우유부단함이 없던 그 여자. 내 품에 안기엔 너무 높은곳에 있는것 같던 그 여자.
결국 내가 그녀의 마음을 온전히 소유하기엔 실패하고야 말안던 그 여자였다.

나는 그녀를 많이 좋아했지만 그녀는 늘 내 손에서 닿을듯 말듯한 거리를 맴돌았고 결국 우리는 사귄지 몇달만에 헤어지고 말았다. 헤어졌다고는 하지만 공식적으로 이별의 절차를 밟은것은 아니고 그녀는 나에게 늘 자신의 한계를 분명히 정해놓고 그 이상 들어오지 말라고 말하고 있었기에 나는 결국 포기하고서 그녀에게서 멀어져간 참이었다. 마지막으로 만난것은 아마도 몇주전의 일이었다.


그녀는 나의 집에 한두번인가 와본적이 있었다. 언젠가 한번은 일요일 낮에 내가 꾸벅꾸벅 졸면서 쉬고 있을때 대뜸 예고없이 집에 찾아와서는 곧장 욕실로 뛰어들어가 샤워를 하고서는 별다른 이야기도 하지 않고 휭하니 가버린 적도 있었다. 아무튼 덕분에 그녀는 아직까지 비밀번호를 기억하고 있었던것이다.




살이 조금 빠진듯한... 그리고 술을 조금 마신듯한 그녀.
네이비 블루의 플레어 스커트에 좀더 밝은 톤의 블라우스. 어두운 색깔의 재킷을 입고 있었고 비를 맞은듯 머리가 살짝 젖어있었다.

그렇게 온 이유도 묻지 않고 나는 그냥 그녀를 내 옆에 뉘였다. 눈감은채 "잘 지냈어?" 라는 나의 한마디에 내 가슴에 얼굴을 파묻는 그녀. 그리고 우리는 아무말이 없었다.
입을 맞추는 소리.. 침대가 눌리는 소리..그리고 그녀가 옷을 벗는 소리...
그리고는 마치 당연히 해야 할일을 하듯이, 그녀와 나는 사랑을 했다.




사귀고 있을때에도...그리고 헤어진 후에도 먼저 연락하는 일이 없었던 그녀가?
내가 마음을 열고 몸을 낯추고 다가서려고 할 때 늘 외면하던 그녀가?
이젠 그만하고 싶다는 뉘앙스를 보냈을때 한치의 망설임도 없이 돌아섰던 그녀가?
인간대 인간... 혹은 남자와 여자사이의 기본적인 예의를 전혀 지키고 싶어하지 않던 그녀가?
그런 그녀가 오늘 내 침대를 찾아든 이유는 무엇일까...




"어쩐일이야 ...?"





"오빠 있을땐 몰랐는데 ... 없어지니깐 계속 생각났어 ... 오늘 술마시면서 더했고 ..."




그리고 다시 물을 뿌린듯한 침묵이 이어졌다.
그녀는 천천히 욕실에 들어가 샤워를 했다. 기억이란 참 신기한 것이다. 욕실로 가는 길도 욕실을 사용하는 방법도 그녀는 조금도 낯설어 하지 않았다. 익숙하게 샤워를 하고는 타월로 욕실 거울을 닦고 나와서 옷을 입고는 머리와 얼굴을 손질했다.
나는 그녀를 현관까지 배웅했고 그렇게 그녀를 보냈다.




그녀가 가고 난뒤 나는 맥주 한잔을 더 마시고 다시 침대로 기어들었다. 아무것도 생각하고 싶지 않았지만 머리속에는 정돈되지 않은 생각이 이어지고 나는 다시 선잠에 들었다.
지금 무슨일이 일어나기나 한것일까? 정말 그녀가 여기에 다녀간 것인가? 아니면 혹시 내가 꿈을 꾼게 아닐까...?




그러나 그 밤이 다 지나기도 전에 그녀로부터 날아온 문자 메세지가 다시 확인시켜 주었다.




" 오빠 다시 와줘 다시 만나자 나 잘할께 "




나는 폴더를 열고 멍하니 화면에 찍힌 15개의 글자를 쳐다보았다. 그녀와의 일을 처음부터 다시 생각해보고 판단하고 그리고 대답을 해주어야 하는것일가? 아니면 지금 머릿속에 가장 먼저 떠오르는 생각을 이야기해 주어야 할까?




" 이젠 너무 늦어버렸어... "




" 무슨말이야? 만나는 사람있어?"




"아니, 아무도 없어, 너 이후론 난 계속 혼자였어."




"나한테 화났어? 아직 마음속에 담아두고 있는거야?"





"아니야, 난 그때도 지금도 똑같이 널 좋아해.서운한 감정도 없어. 다만 달라진게 있다면 이제 예전엔 우리와 함께 있던 어떤 것들이.. 그 공기가.. 사라져버렸다는 말이지.. 봄날의 분위기 였거나.. 아니면 일요일 오후의 어떤 마력같은것... 그런게 있었는데 이젠 사라져 버렸어."




"무슨 의미야?"




"시간이 흘렀다는 말이야. 너는 날 생각하는 마음이 변했고 난 널 생각하는 마음이 안 변했어. 하지만 시간은 이만큼 흘렀어. 난 변하지 않았더라도 이 시간은 어쩔수 없는거야. 그때의 그 분위기, 그 느낌은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테니까. 그때가 아니면 안되는 거니까. 그래서 이제는 어쩔수가 없어"




그리고 그녀로부터 답장이 없었다. 나는 "잘 지내"라고 마지막 메세지를 보냈고 그녀로부터 역시 "잘 지내" 라는 짧은 답장이 왔다. 이것이 마지막일 것이다.
내가 한 말이 옳은것인지, 잘한것인지, 혹은 내가 한 행동이 옳은것인지, 잘한것인지, 나로서는 알 수가 없었다.


그러나 만약에...
만약에 그날 밤이 지나고 나서 다음날 그녀가 그런 말을 내게 해왔다면 나는 그녀와 다시 시작하는것을 보다 더 진지하게 생각했을 것이다. 그리고 결국에는 마음을 가다듬고, 처음의 마음을 다시 생각해 내려고 노력하며 나는 그녀를 받아 들였을 것이다. 나라면 틀림없이 그렇게 했을것이다.  만약에 그녀가 그날 밤이 지나고 다시 밝은 한낮에 그런 말을 해왔다면.

하지만, 그날 밤이니까 그녀가 그런말을 할수도 있었던 것인지도 모른다. 어쨋든 그밤에 날 찾아온것까지는 어쩔 수 없다 하더라도 다시 시작하자는 말은 그  다음날에 하는편이 더 좋았을것이다.  그러나 그 다음날이 오면 그녀는 그런 말을 하지 않았거나 못했을 것이다. 그것은 마치 밤에 쓴 편지는 아침이 되면 보내지 못하는 것과 비슷한 원리다. 원래 대개는 그런 법이다.

그밤이 지나고 다음날이 되어서도 그녀가 나를 저렇게 원하는거라면 그건 그녀의 온전한 진심이라고 생각할 수 밖에 없으니까 나는 정말로 감동하고 말았을 것이다.

그러나 그녀는 뭔지는 모르지만 어떤 공기나 분위기에 사로잡혔던 그날밤 날 찾아왔고 그 밤이 채 지나기도 전에 그런말을 내게 해왔다. 그러므로 나는 역시 저렇게 대답할 수 밖에 없었다. 우리는 같은 시공의 같은 분위기에서 있었으니까. 어쩌면 그녀가 나의 입장에 있었더라도 나와 똑같은 대답을 내놓았을것이다.

이렇게 해도 괜찮은것일까? 이렇게 흘려보내는것이 옳은 것일까?
어쩌면 나는 후회를 하게되는걸까? 그녀가 아니면 이젠 내겐 기회가 없는걸까? 이 결과는 내가 선택한것일까? 아니면 혹시 그녀가 선택한 것일까?

우리는 어쩌면 언제까지나 "아직은 아냐"(not yet) 와 "너무 늦었어"(too late) 사이에서 살아가고 있는건지도 모른다.  이런 생각을 하면 서글퍼진다. 서글픔이 나약함을 낳고 나약함은 운명에 대한 "순종"을 낳는다. 그냥 그렇다는 얘기다.




결국 나는 다시 일어나서 불은 켜지 않은채 술을 있는대로 꺼내서 마시고 담배를 다섯개비쯤 피운뒤에 어지러움을 느끼고 다시 침대 위로 쓰러졌다. 머리의 감각이 둔해져가고 있었고 상대적으로 청각과 후각은 예민해져 가고 있었다. 이제 PC에서는 류이치 사카모토의 노래가 나오고 있었다.
참대에는 아직 희미하게 온기가 남아있었고 시트에서는 그녀의 냄새가 베어있었다. 예전에 그녀가 나의 집에 마지막으로 남기고 갔던 것은 클린징 크림과 헤어 밴드였다. 오늘은 냄새 이외에는 아무것도 남기지 않았을까? 오늘밤에는 굳이 확인해보고 싶지 않은 일이다. 


그녀는 내게 다시 자신의 냄새를 남겨놓고 떠났다. 보통의 여자라면 이제 다시는 내 집을 찾아오는 일이 없겠지만 아마 그녀라면 다시 찾아올 수도 있을것이다. 그녀는 그렇게 할수 있는 여자다. 그래서 나는 지금도 그녀를 좋아한다. 그렇지만 나는 다시 찾아온 여자를 그렇게 보내버렸다.
이런 생각을 하고 있는동안 문득 베개가 젖어가고 있다는것을 깨달았다. 어째서 내가 울고 있는지, 나도 이해할 수 없었다. 


비밀번호, 그녀의 냄새가 배어있는 침대시트.

 이런 생각을 하며 나는 잠이 들었다. 잠이 들기전에 마지막으로 흘러나온 노래는 "under swing candle light" 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