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노무현 세력은 ‘미래에 대한 약속’이 실패하더라도 아무도 책임질 필요가 없음을 보여줬다. 이는 결국 좌파의 특권인 ‘유토피아에 대한 전망’을 우파에게 넘기는 계기가 되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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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3호] 2009년 04월 13일 (월) 11:05:24 |
이택광 (문화 평론가·경희대 영미문학 교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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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공동취재단 이명박 정부는 노무현 정부의 계승이고 완성이라고 할 수 있다. 위는 이명박 대통령 취임식 때 모습. | 노무현은 단순한 ‘정치인’이었다기보다 불가능한 것을 가능하게 만든 기적의 기표였다. 노무현이라는 기적 앞에서는 어떤 정치공학 예측도 통하지 않았다. 노무현이 대통령 후보로 떠오른 시기는 김대중 정부를 수립하는 데 한몫했던 ‘지역등권론’이 여전히 기세를 떨치면서, 호남·충청 연대를 통한 민주당 재집권이라는 시나리오에 모두 빠져 있을 때였다. 이때 노무현 카드는 강준만을 비롯한 민주당 지지자들에게 영남의 유권자와 부동층을 공략하기 위한 변수로 던져졌다. 그리고 예상을 뒤엎고 ‘서민 대통령’의 이미지가 강했던 노무현이 마침내 대통령에 당선했다.
이전과 달리 노무현이라는 정치인을 대통령으로 만든 건 ‘킹 메이커’가 아니었다. ‘희망돼지’와 ‘노사모’ 같은 자발적인 시민 참여가 노무현 정부 출현에 중요한 힘으로 작용했다. 이를 기념하기 위해 노무현 정부는 스스로를 ‘참여정부’라고 명명했다. 참여정부 내내 ‘노무현’이라는 기표는 기독교의 예수처럼 보수 정치인을 질타하는 기준으로 작동했다. 민주당의 분열과 열린우리당의 창당, 그리고 탄핵 정국은 이를 정확하게 증명하는 사건이었다.
국민에게 ‘원칙에 대한 배반감’ 안겨줘
이처럼 그는 선과 악, 적과 아, 보수와 진보를 갈라 치는 척도였기에 노무현에 대한 국민의 호불호도 선명했다. 그러나 지지자든 반대자든, 노무현이 ‘새로운 원칙’이라는 사실은 부정하지 못했다. 열린우리당이 ‘도로 민주당’으로 바뀌어도, 친인척과 측근의 비리가 불거져도, 노무현이라는 기표는 여전히 위력을 발휘했다. 이에 힘입어 자연인 노무현은 퇴임 이후에도 여전히 언론의 조명을 받으며 정치 이슈를 생산하는 새로운 존재로 떠오를 수 있었다. 이 모든 일이 가능했던 게 바로 노무현 전 대통령이 재임 시절에 그토록 강조한 ‘돈을 받지 않는다’는 원칙 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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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노무현 집권에 가장 중요한 주춧돌 노릇을 한 ‘조선일보 반대운동’ 같은 것도 넓게 본다면 시장주의 원리에 따라 움직였다고 할 수 있다. 왼쪽은 지난해 6월 촛불집회 때 조선일보 앞에서 시위하는 시민들. | 노무현이 스스로 원칙을 지키지 못한 것은 짐작보다 더욱 심각한 문제다. 노 전 대통령의 금품 수수에 대해 몇몇 언론은 도덕성에 치명적 상처를 입었다고 논평했다. 그런데 이 문제를 도덕성의 관점에서 보자면 일부 지지자처럼 ‘그래도 역대 대통령 중에서 제일 적게 받았다’ 식의 옹호가 가능하다. 어쩌면 노 전 대통령이 이를 노리고 돈을 받았다고 시인했을지도 모른다. 이명박 대통령의 후보 시절에 발생한 도덕성 시비에서 확인할 수 있듯이, 한국의 유권자는 대체로 도덕적인 흠에 대해 관대한 태도를 보이는 편이다. “털어서 먼지 안 나는 사람 있나”라는 자조적 발언이 이를 잘 드러낸다.
그러나 문제를 ‘원칙의 붕괴’라는 차원에서 들여다보면 상황은 심각하다. 노무현 정부는 끊임없이 자신들을 진보 세력으로 이미지화했고, 실제로 보수 세력과 국민도 그렇게 생각했다. 노무현 세력이 아무리 부정하려고 해도, 이번 사건은 국민으로 하여금 진보 세력이 집권해도 부정부패의 고리를 끊지 못한다는 인식을 심어주기에 충분하다. 노무현 정부를 풍자하는 말 중에서 가장 정곡을 찌르는 촌철살인의 표현이 바로 ‘좌측 깜빡이 켜고 우회전’이었다. 그럼에도 노무현 정부는 임기가 끝나는 순간까지도 자신들의 ‘우회전’을 인정하지 않았다. 자연인 노무현의 금품 수수가 개인의 불법 행위에 그치지 않고, 한 시대의 종언을 예시하는 사건으로 보이는 까닭은 국민에게 ‘원칙에 대한 배반감’을 안겨줬기 때문이다.
노무현 정부는 자신들을 진정한 ‘진보 세력’이라고 믿었다. 이런 생각은 확실히 ‘민주화운동의 관성’ 때문이라 할 수 있다. 이와 같은 관성은 결국 노무현 정부의 핵심 인사들로 하여금 자신들의 행위에 대해 공정한 판단력을 가지지 못하게 만들었다. 이를테면 이들이 말한 ‘민주화’는 결국 시장의 민주화였고, 시장 자유주의를 도입해 재벌과 보수 언론을 시장경쟁의 논리에 맡기는 것이었다. 실제로 노무현 집권에 가장 중요한 주춧돌 노릇을 한 ‘조선일보 반대운동’ 같은 것도 넓게 본다면 시장주의 원리에 따라 움직였다고 할 수 있다. 조선일보 등 거대 신문사가 구독자 수를 늘리기 위해 시장 원리를 지키지 않는다는 것이 이런 ‘소비자’ 운동을 가능하게 만든 근거였다.
노무현 정부, 기득권 세력 통제할 역량 없었다
따라서 노무현 정부는 ‘민주 정부’이긴 했지만, 그 민주주의는 ‘소비자’의 범주에 한정할 수밖에 없는 것이었다. 사회변혁이 아닌, ‘시장 내 소비자주의’를 노무현 정부는 ‘진보’로 간주했다고 보인다. 임기 말기에 급속하게 추진한 한·미 FTA 협상이 이를 증명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노무현 정부는 정치적인 차원에서 기득권 세력을 통제할 역량을 처음부터 갖추지 못했다. 따라서 이들이 ‘경제 개혁을 통한 반대 세력의 무력화’를 시도하기 위해 신자유주의를 받아들인 건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이처럼 정치 논리로 경제 패러다임을 바꾼 결과는 경제주의 강화와 그에 따른 급속한 탈정치화였다. 이런 탈정치화는 영국 신노동당의 싱크탱크에 참여했던 제프 멀건의 말처럼 ‘정치인 없는 시민의 일상’을 가져왔다. 한국에서 이런 ‘시민의 일상’이란 정치 혐오에 동반되는 ‘먹고사니즘’이었다.
결론적으로 이명박 정부가 오직 경제만을 외치며 집권할 수 있었던 토대를 노무현 정부가 마련해주었다고 말해도 크게 틀리지 않다. 랑시에르 식으로 말하면 노무현 진보 세력은 ‘미래에 대한 약속’이 실패하더라도 아무도 책임질 필요가 없음을 보여줬다. 이는 결국 좌파의 특권인 ‘유토피아에 대한 전망’을 우파에게 넘기는 계기가 되었다.
이런 면에서 보자면 이명박 정부야말로 노무현 정부의 계승이고 완성이다. 물론 이명박 정부는 아직까지도 이 사실을 모르거나 아니면 인정하지 않는 것처럼 보이지만 말이다. 노무현 시대의 종언은 이명박 정부나 한나라당에게도 좋은 일만은 아니다. 이제 정치혐오증을 등에 업은 탈정치화의 기세는 더욱 거세질 것이고, 여야를 막론하고 정치인은 모두 부정부패의 화신이라고 도매금으로 넘어갈 공산이 커졌기 때문이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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