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ASEBALLPARK

나도, 그 보도자료를 봤다. 사회복지공동모금회가 설립 10주년을 맞아 배포한 보도자료를 말이다. 그 보도자료에는 분명히 적혀 있었다. 개인 기부자 순위. 1위는 ‘익명’, 기부 규모는 8억5천만원이었다. 2위는 홍명보 전 축구 국가대표팀 코치, 3위는 김정태 전 국민은행장…. 그랬다. 분명히 1위는 ‘익명’이었다.

그날은, 마침 사회복지공동모금회 관련 기획 기사를 취재하던 날이었다. 대부분의 기자들은 전화로 모금회 홍보팀 차장을 접촉했지만, 나는 그날 반나절 가량을 함께 있었다. 10년 전 불우이웃돕기 성금에 대한 정부의 개입과 간섭을 막기 위해 ‘사회복지공동모금회법’을 만들었는데, 지금 정부가 이 법을 무력화하고 다시 성금에 개입하려는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는 기사를 취재하기 위해서였다. 익명의 기부자가 누구인지는 궁금하지 않았다. 왼손이 하는 선행을 오른손이 모르게 하겠다는데, 그것을 굳이 알아내 보도해야 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다.

분위기가 뭔가 이상하다는 느낌이 든 건 조금 뒤였다. 같이 있던 홍보팀 차장에게 계속해서 걸려오던 전화 때문이었다. 수화기 너머의 목소리를 들을 순 없었지만 차장의 답변 내용을 들어보니 계속해서 ‘익명의 기부자가 누구냐’는 질문임을 알 수 있었다. 이상했다. 다들 나처럼 생각할 줄 알았는데, 다른 기자들은 익명의 기부자가 누구인지 알고 싶었던 모양이다. 차장은 그 모든 전화에 기계적으로 답했다. “알려드릴 수 없습니다. 만약 누군지 알려지면 다시는 저희 모금회쪽에 기부하지 않겠다고 합니다. 이해해 주십시오.” 나도 기자였지만, 이 답변이 맞다고 생각했다.

	▲ 배우 문근영씨 ⓒ공식 홈페이지

보기 좋게 물을 먹은 것이다. 다른 기자들이 전화로 취재하던 그때, 나는 반나절 가량을 공동모금회 쪽 인사들과 함께 했음에도 불구하고 소위 말하는 낙종을 한 것이다. 물론 나도 기사를 썼다. 정부가 범정부 차원의 위원회를 만들어 불우이웃돕기 성금 모금과 배분에 관여하려 한다는 내용을 단독 보도했다. 이와 관련한 계획이 상세하게 적혀 있는 보건복지가족부의 내부 문건까지 찾아내 보도했다. 그러나 이 보도는 거의 주목을 받지 못했다. <뉴스데스크>에 심기지도 못해 <뉴스투데이>(아침뉴스)로 보도됐고, 포털사이트 대문에 실리지도 않았다. 당연히 다른 언론을 통해 확대 재생산되지도 않았다. 

그래서다.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익명의 기부자는 무조건 익명의 상태로 지켜줘야 한다는 내 생각이 틀렸던 것일까. 그렇게 생각한 덕에 낙종을 했지만, 여전히 나는 내가 최소한 틀리지는 않았다고 생각한다. 익명의 주인공이 문근영인 것으로 밝혀짐에 따라 한 연예인의 따뜻한 선행이 알려졌지만, 동시에 어떤 이들은 그녀의 가족사를 추악하게 해석해 그녀의 선행과 연관지어 더러운 비난을 퍼부었다. 일절 인터뷰에 응하지 않는 모양이어서 그녀의 구체적인 심경은 알 수 없지만, 어린 나이에 얼마나 큰 상처를 받았을지는 짐작하기 어렵지 않다. 그 익명의 주인공이 꼭 문근영이 아니었다 하더라도 얼마든지 비슷한 일이 일어날 수 있었을 터다.

5년간의 짧은 기자생활을 통해 얻은 나름의 신조가 있다면 “진실은 진보적이다”라는 명제다. 정부와 기업과 학교 등이 말하지 않는, 숨겨진 진실을 찾아내 국민들에게 알리는 게 기자의 제1과제라고 생각한다. 그것 자체가 진보적인 일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그렇다면 이 경우는 어떨까. 5년 간 8억5천만원을 기부한 익명의 천사. 그 주인공이 문근영씨라는 것도 분명히 ‘진실’이었는데, 그렇다면 이 경우 역시 진보적인 일이었을까.

그래서다. “진실은 진보적”이지만, 동시에 나는 “몰라도 되는 건 모르는 게 좋다”라고 생각한다. 이것이 내 두 번째 신조다. 언뜻 보기엔 분명히 상충되는 두 가지 명제, 그러나 현실적으로는 상충되지 않는다. 그래서 사회복지공동모금회를 둘러싼 정부의 알려지지 않은 계획에 관심을 가졌고, 익명의 기부자가 누구인지를 궁금해하지 않았다. 문제는 이러한 판단이 옳았는지 틀렸는지를 분별하기가 언제나 쉽지 않다는 점이다. 하지만 나는 계속해서 두 가지 신조를 지켜나가려 한다. 언명으로는 상충되지만 현실적으로는 상충되지 않는 그 미묘한 사이에서 냉정하게 균형을 잡고 치밀하게 취재하는 일을 말이다.

MBC 보도국 사회정책팀 소속으로 복지부와 식품의약품안전청을 출입하고  있습니다. 입이 없는 사람들의 입이 되겠다는 첫 마음을, 모든 진실은 진보적이라는 기자생활의 교훈을 잊지 않으려 노력하며 천성적으로 게으른 몸과 마음을 취재현장으로 내몰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