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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찌됐건>

0. 도대체 이 아까운 종이를 몇 장 째 버리고 있는지 모르겠다. 날이 갈수록 편지를 쓰는 것이 힘들어진다. 결국 종이의 가치를 존중하여 단번에 써내려가기 위해, 워드로 쓰고 나서 손으로 옮겨 쓰는 중이야. 어찌됐건 애꿎은 편지봉투만 어색하게 홀로 남아버리겠군. ―이 원래 글이었지만, 편지 대신 메일로 보내야 한다는 사실로 인해 시작이 바뀌어 버렸어. 아쉽다. 어찌됐건 소통을 하는 것이니 상관없겠지. 그래도 아쉬운 건 아쉬운 거야.(그래서 원래 버전으로 보낸다.)

1. 향기 없는 파워포인트의 텍스트상자 서식배경 따위에서나 있을 법한 질감의 편지지는 나에게 아날로그식 편지를 써라, 써라, 쓰라고, 쓰지 않고서는 못 배기게 만드는군. 이런 클래식한 종이엔 붓펜이 참 잘 어울린다고 생각하는데, 지금 당장 없는 걸 어찌할까? 너와 나의 관계처럼 말이야. 하지만 생각보다 플러스펜도 썩 괜찮은 것도 같다. 너와 나의 관계처럼 말이지. 전자가 됐건, 후자가 됐건, 편지지에 예기치 않은 빗방울일까 눈물일까, 라도 하나 또옥, 하고 떨어져 버린다면, 스르르 번져버리는 건 똑같을 거야.

2. 나온지 꽤 되었지만, 이런저런 이유로 보지 못 했던 <2046>을 얼마 전에 보았어. 언제나 왕가위 영화를 보고 나면 눈가에 눈물이 번진단 말이야. 물론 예상한 것이지만. 왕가위는 <2046>에서 내가 주구장창 주창하던 ‘사랑은 타이밍이다’론을 전세계적으로 설파했더라고. 만난 적도 없고 팬레터를 쓴 적도 없는데도 불구하고! 영화에서 양조위가 왕정문과 엇갈리면서 옥상에서 너무나도 맛있게, 멋있게 하지만 슬프게 담배를 피면서 내뱉은 한숨이 ‘사랑은 타이밍이다’였어. 사랑이 타이밍이건 운명이건 어찌됐건 간에 중요한 건 둘이 엇갈렸다는 거야. 엇갈림. 너와 나는 10년간(햇수로는 10년이야) 얼마나 많은 엇갈림 속에 지내왔을까? 크고 작게, 이소라의 <청혼>부터 ‘진주야? 서울이야?’까지 셀 수 없겠지. 아마도 너와 나는 엇갈림을 믿는 사이인가보다. 왕가위 영화의 주인공들 대부분이 사랑보다는 외로움을 믿는 사람들인 것처럼. 어느 날 7번 국도를 따라 동해를 거닐며, 바라본 풍경은 참으로 눈물겹도록 아름답더라. 파스텔톤의 푸른 커튼과 파란 카펫은 빛났어. 그 풍경에 누가 될까봐 그러진 못 했지만, 사이렌의 노랫소리가 없더라도 풍덩 몸을 던져버리고 싶더라. 수평선에 맞닿아 있는 하늘과 바다가 결국엔 단 한 순간도 만날 수 없는 그 아름다운 광경이 얼마나 눈물겹던지.

3. 이런 감상은 근대에 들어서는 통제되어야 할 정념으로 분류되어 있더군. 근대의 권력자들이 이성에 눈을 뜨게 되면서 디오니소스적 인간(물론 이 개념이 훨씬 뒤에 나오지만)은 저열자 취급을 해버리니, 망할 놈의 데카르트! 이런 데카르트 이후로 세계는 진보를 믿게 되었고, 그것의 수단으로 과학기술이 우뚝 섰어. 과학기술은 우리의 삶을 많이 변화시켰다는 사실은 너도 잘 알 거야. 그 변화 속에서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은 과학기술의 발전이 시간과 공간을 압축하는 동시에 확장한다는 점이지. 마셜 맥루언은 기술은 인간의 연장이라고 주장해. 철도와 자동차는 인간의 발을 확장시킨 거고, TV는 인간의 눈을 확장시킨 거고, 에세트라. 물론 보드리야르는 인간이 기술의 연장이라고 틀어 말하지만. 난 이게 더 마음에 들어. 어찌됐건 기술이 발전하면서, 인간의 시간은 과거와 현재가 동시간에 존재할 수도 있게 되었고, 수천 km가 떨어진 곳도 바로 눈앞에서 볼 수 있게 되었어. 새삼스럽지만 정말 과학의 기술이란 대단해. 과연 이런 세계를 데카르트는 꿈에서라도 생각할 수 있었을까? 정말 이런 변화는 세상의 모든 걸 변화시켰어. 대단하지 않아? 그런데, 왜, 나도 몰라, 너와 나의 관계만은 과학기술의 발전에도 불구하고, 별다른 영향을 받지 않은 것 같군. 콕 꼬집어 말하기에는 정리도 잘 안 되거니와 너무 길어질 테니 생략. 굳이 말해야 한다면, 내가 널 처음 본 날, 빛나던 그날, 그때 만들어진 30분의 시간차와, 옆으로 두 칸, 앞으로 세 칸의 3m 거리라고 할 수 있을 거야. 그 이후로 너와 나는 그 시간과 공간을 줄일 수가 없었던 것 같아. 처음부터 너와 나는 30분과 3m의 메울 수 없는 간격 사이에 너와 나의 다리를 놓아두었던 게지. 어떤 과학기술로도 줄일 수 없는 그 사이.

4. 그러나 정말 30분이었던지, 옆으로 두 칸 앞으로 세 칸의 3m 거리인지는 확실치 않아. 왜냐면, 인간은 지각과 인식이란 터무니없이 많은 오류를 가지고 있으니. 그래서 인간과 인간 사이의 커뮤니케이션에선 자주 오해가 생겨나는 거겠지. 지난 토요일 밤, 술에 잔뜩 취해 비틀거리는 나에게, 길 가던 어떤 여자가 나에게 목도리를 벗어주었어. 우습게도 예, 라고 대답하고 목도리만 받았지 뭐야. 이런 이야기들을 친구들에게 했더니, 니가 기억하지 못 하는 부분이 있을 거야, 라고 말해주더군. 그러나 분명히 내 기억 속엔 저게 전부야. 하지만 술에 취한 녀석의 기억이 온전할까? 그냥 길을 걷다 한 여자를 마주 쳤고, 때마침 떨어진 목도리를 내가 들고 가버렸는지도 모르는 일이지. 그럼 그 때의 일도 그랬을까? 마찬가지로 잔뜩 취한 상태였으니까. 술이란 가뜩이나 불완전한 인간을 심지어 불안하게까지 만들어. 나의 불완전한 기억들의 퍼즐을 완성하니, 그것은 오류일 가능성이 크고, 뭔가 오해가 있었으리라, 불안이란 단어가 남더라. 어찌 됐건, 모두 대학로 어느 거리의 늦은 겨울밤에, 술에 취한, 그것도 잔뜩 취한 나에게 있었던 일이야. 흔들리는 눈빛이 뿌연 밤하늘에서 별 볼 일이 있을까? 별은 보이지 않을 뿐이지, 없는 것은 아니야. 너도 그건 알잖아?

5. 가장 밝지만 새벽녘에 잠깐 볼 수 있는 샛별, 밤하늘의 어느 별보다 지구와 가장 가까이 있는 금성, 그리고 전기 사춘기의 대부분인 1114일과 후기 사춘기 수많은 순간 속에서 함께 했던 나의 비너스. 왜 금성은 달이 아닐까? 현재로서는 나의 성스러운 별에 인간은 갈 수가 없대. 인간의 염원인 우주여행이 가능해진다면, 난 반드시 금성을 갈 거야. 갈 수만 있다면 반드시. 죽기 전에 단 한 번만이라도, 아아. 어찌됐건 지금은 마냥 볼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다행이야.

0. 어쩌다 이 편지를 쓰게 됐는지 모르겠다. 아무쪼록 밸런타인데이 선물로 받아들였으면 한다. 달콤한 초콜릿이 아니라 카카오 함유량이 높은 씁쓸한 초콜릿이라 일반적인 밸런타인데이에는 어울리진 않겠지만, 몸에 좋다잖아.



epilogue.
금성이 폭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