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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늦은 가을의 끝자락, 혹은 이미 시작된 겨울의 문턱에선 늦은 오후의 아쉬운 햇살 한조각. 괜히 조금 아쉽고 시간이 흐르고 있다는 사실을 확실히 느끼기 좋은 계절, 그때의 분위기 좋은 교양수업시간. 학점이 후하다는 평가와 수업태도에 대해 너그럽다는 평가를 동시에 받는 강사의 교양수업시간. 몇몇은 졸고 있거나 망상의 바다에 빠져서 헤엄치고 있어야 하는, 그런 시간임에 틀림없지만... 분명 지난주 수업시간만 하더라도 그랬었던게 틀림없다고 기억하고 있었으나...

 평소에도 학생들과의 커뮤니케이션이 원할한 편이긴 하였으나, 오늘처럼 이렇게 잦은 질의를 시도하지는 않았었던 강사였다. 물론 평소와 같이 질문의 수준이 어렵지는 않았다. 조금만 생각하더라도 약간의 위트를 담아 대답할 수있을만한 적절하고 재미있는 질문이 이어졌다. 이런 경우 당연히 학생들의 수업 참여도는 높아지게 마련이지만... 이정도는 약간의 오버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그 질문들은 정확히 모두다 완벽하게 내게 이루어지고 있다. 그래서 수업분위기가 좋다. 

 내가 정확히 기억하고 있다면, 지금의 질문이 19번째인것 같다. 이번에도 대답은 그리 어렵지 않았다. 처음에는 나름 센스있어 보이려고, 혹은 지지않으려고 위트를 담아 대답을 하려고 노력했다. 그러나 이젠, 지쳤다. 질문의 공식은 간단하다. 완전하게 내가 어이없이 수업전에 노트를 빌리려고 했던, 그녀를 보며 이야기를 진행하다가 질문을 말하면서 시선을 내게 옮겼다. 그리고 질문의 대상은 나다. 계속 그렇다. 그녀와 마치 대화하듯 수업을 진행하면서 질문은 내게만 했다. 오로지 나한테만. 

 어찌보면 억울하다. 앞뒤정황을 맞춰보더라도 이 정도로 즐거울 만한 소재는 아닌것 같은데, 모두가 끊임없이 즐거워 하고 있다. 내게 또 다른 질문이 이어질때마다 다른 모든 학생들이 즐거워 한다. 이건 그녀의 책임도 있다. 강사가 내게 이런 가혹행위를 계속하는 동안에도 즐거워하며 강사와 맞장구를 쳐주고 있기 때문이다. 그녀가 조금이라도 곤혹스러운 모습을 보여주거나, 이젠 지겹다는 표정을 보여주기만 했더라도 나를 향한 공격이 조금 줄거나 멈췄을것이다. 이 상황이 즐겁단 말인가. 

 어쩔 수 없었다. 나도 화를 낼 수는 없었다. 그녀가 웃으니까. 그녀가 보여주는 미소는 너무 보기 좋았다. 질문이 내게 이어질 때마다 내게 고개 돌리며 보여주는 그녀의 미소는 내가 화낼 수 있는 조건을 완전히 봉쇄해 버렸다. 그저 지쳐갈 뿐이었다. 그리고 내 지친 표정은 강사의 질문 공세에 어떤 가학적인 즐거움을 더해준듯 하다. 지친 표정으로 꼬박꼬박 대답하는게 우스운 모양이다. 모두들 즐거워 한다.  

 전황을 개선시킬 어떤 방법도 없고, 평화적 합의또한 불가능한 상태일때 취할 수 있는 방법은 딱 한가지 뿐이다. 그렇다. 포기하면 편하다. 항복하기로 마음 먹었다. 스무번째 질문이 내게 이어지려고 하는것 같다. 수무고개는 절대 넘을 수 없다. 백기를 들기로 했다.



 "살려주세요"



 하얀 손수건이 있었다면 손수건을 꺼내 흔들고 싶었으나, 그런 퍼포먼스를 했었다가는 이 웃음에 목마른 인간들에게 웃음거리를 퍼주고 말았으리라고 생각한다. 단지 두손을 살짝 들어올린 내 모습에 예의없이 소리내서 낄낄거리는 인간들이 좀 많았다. 소리내서 웃는 인간들은 대부분 남학생들이다. 이 나이때 여학생들은 소리내서 잘 웃지 않는다. 웃음도 눈물과 함께 그들의 무기라고 생각하는것 같다. 

 항복은 받아들여 졌다. 그녀와 붙어다니는 다른 누군가에게 질문이 이어지리라는 내 희망은 사라지고, 질문은 완전히 멈추고 평화가 찾아왔다. 슬적 고개를 돌려 그녀쪽을 봤다가 그녀의 미소와 마주쳤다. 아직도 뭐가 그렇게 즐거운지 웃고 있는 그녀와 눈이 마주치고 나도 살짝 미소 지었다. 제발 내 얼굴이 웃는 표정을 잘 구사했길 바란다. 근육은 마치 일그러지는 듯한 느낌이었지만... 그리고, 다시 웃고있는 강사의 얼굴과 마주쳤다. 정말 근육이 일그러지는것 같다. 

 쉬는시간이 왔다. 잠시 쉬었다가 계속 하자는 이야기가 지금 이순간 정말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냥 계속 수업을 진행해 줬으면 좋았으련만, 쉬는시간이다. 이 상황을 어쩔까 고민하다가 죽은척 하기로 마음 먹었다. 의자에서 일어나는 소음들을 들으며, 책상위에 엎어졌다. 여기저기서 웅성거리는 소리의 소재가 제발 내가 아니길 간절히 기도하는 마음으로 시체놀이를 시작했다. 

 누군가 내 어깨를 살며시 흔든다. 일어나 달라는 신호겠지. 내게 뭔가 의사표현할게 있다는 의미겠지. 어렵게 고개를 들어 돌아 보았다. 그녀다. 그리고 웃으며 양손에 커피를 들고 한손의 커피를 내게 내밀고 있다.



 "엑"


 "엑? 커피 싫어 하세요?"



 '엑'이 뭐람. '엑'이... 내 혀는 왜 중학교 입학 이래로, 항상 내 또래 여성에게 의사를 표현하는데 이렇게 어려움을 느끼는 걸까...



 "아.. 아뇨.. 안싫어 해요. 싫어하지 않아요. 좋아해요. 커피"


 "ㅎㅎ 그럼 커피 드세요"


 "아.. 네.."  



 이게 끝이 아닌데, 뭔가 빼먹은것 같다. 아. 역시... 고맙다는 말을 안했다. 그리고, 왜 내게 커피를 줬는지 물어봐도 될것 같다. 



 "아.. 커피 고마워요. 근데, 왜.."


 "아까 노트 빌려달라고 하셨죠?"



 질문에 완전히 다른 질문으로 대답하는게 과연 대답인가 질문인가... 그게 무슨 상관이람. 난 그녀와 대화를 나누고 있다. 좋다.



 "그런데, 저보다 노트필기는 더 잘하신것 같은데요?"


 "네?"



 이런! 난 대답과 동시에 그녀의 시선을 따라, 내 책상위에 펼쳐진 내 노트로 시선을 옮겼다. 예비역 복학생답게 착실하게 작성되어 있는 내 노트는, 이런 급박한 상황에 봐도 참 정결하다. 대뇌의 느린 사고판단과는 항상 별개로 움직이는 내 신체의 각기관 답게 내 손은 빠르게 움직여 노트를 덮으려고 했다. 지금 덮어서 뭐가 어떻게 변한다고 그런 행동을 했는지는 모르겠지만, 덕분에 내 손안에 있던 커피가 적절하게 컨트롤 되어 노트위로 쏟아졌다. 윽!



 "어머! 괜찮아요?"


 "네? 네네.."


 
 한심하다는 듯한 표정은 마음에 안들지만, 친절한 내 근처 학생이 가방에서 휴지를 꺼내 줬다. 고맙다는 말은 내가 해야 하는데, 노트가 심하게 훼손되었다는 망연자실한 감정 때문인지 그녀가 나 대신 고맙다는 말을 했다. 정신없는 내 감정과 별개로 그녀의 얼굴을 봤는데, 웃고 있다. 지금 이 상황이 웃기니? 응? 
  


 "노트 어뜩해요"


 
 지금 웃으면서 그렇게 말하는게 정녕 내 노트의 안위를 걱정하는 말이니? 응? 그래, 그래도 좋다. 난 네 웃음이 너무 좋다. 풋, 그깟 노트 따위.



 "이따가 노트 빌려 드릴까요?"


 "네? 네.."



 커피를 휴지로 닦다 보니, 손이 좀 끈적여서 화장실을 다녀오고 싶었는데, 강사가 강의를 다시 시작 하시려고 하신다.



 "아 학생. 젖은 노트는 괜찮아요. 지금부터 필기할 내용은 없으니까"



 어이, 어이...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