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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역사적 인물들이 많고, 문화예술 전반의 르네상스가 영정조시기 지속되었고, 개인사의 극적인 요소들이 기본적으로 깔아준다는 거. 

무엇보다 '영명한 임금이 나쁜 간신배 세력의 조직적 발호에 맞서 백성을 위한 개혁을 밀어붙이다 의문의 죽음을 당한다 (정사에 충실하자면 의문의 죽음이라고 보긴 좀 어렵지만, 일찍 죽었기 때문에 많은 창작물들이 이런 관점을 취하고 있죠)' 라는 것은 군주제 시대의 임금을 다루는 스토리로서 로망 자체니까요. 정조시대의 개혁을 저렇게 단순화시켜 표현할 수는 없지만 학술서적이 아닌 이상 뭐 익스큐즈되는 것이고..

근데 이런 관점을 너무 밀어붙이다 보니 생기는 폐단이, 의도치 않게 정조 자신이 안습하게 그려져 버리는 듯 하네요. '거대한 악의 세력' 에 맞서 투쟁하다 좌절한 비극성을 너무 강조하다 보니, 결국 "악의 세력이 너무나 거대하여 아무것도 못한 임금"이 되어버리는 거죠.

특히 한성별곡은 잘 만든 드라마이긴 하지만 이런 게 너무 심해서.. 정조가 영명한 개혁군주라기보단 거의 불쌍하고 무력한 동정의 대상으로까지 폄하되어 버리더군요. 특히 정조의 죽음을 노론세력의 음모를 폭로하기 위해 알고도 죽음에 뛰어드는 자살성 타살로 묘사한 건 너무 심했다는 생각이..

그리고 드라마에서 너무 자주 등장하는 대사, "탐관오리들의 착취로 백성들은 도탄에 빠지고~" "사대부 양반들의 창고에 쌀이 썩어나는데 백성들의 삶은 해마다 나빠지니~" 등등...

좋은 말도 자꾸 들으면 짜증나는 법인데, 아무리 당시 백성들의 삶이 실제로 그런 측면이 많았고 백성들의 편에 서서 좋은 뜻으로 드라마를 풀어나가는 의도라 할지라도 저 대사들이 매회 반복되면 식상해요. 우리 나라 사극은 삼국시대를 그려도 저 대사 고려시대를 그려도 저 대사 조선시대를 그려도 저 대사. 저런 추상적 대사를 10번 반복할 시간에 조금이라도 당시의 구조적 모순을 좀 더 구체적으로 그리려는 노력을 했으면 좋겠어요. 시대별로 착취방식도 다 다르고 경제적 모순도 다 다른데 그냥 저 대사만 반복하면 다 설명이 되는 줄 아나봐요. '다모' 가 특히 정말 심했죠.

한성별곡은 시전과 난전의 대립의 정치적 배경도 그리면서 좀 노력하기는 했지만 여전히 너무 부족하죠. 백성의 절대다수를 차지하는 농민의 삶에 있어 남인 세력이 구체적으로 뭘 주장했기 때문에 그들이 개혁세력이라고 할 수 있는지에 관한 이야기가 전혀 없어요. 그냥 '성군 정조'를 지지하기 때문에 선한 세력이고, 벽파는 반대하기 때문에 권세에만 눈이 멀고 백성의 삶을 생각지 않는 사람들이란 식이 되어버리죠. 

아 있긴 있습니다. 화성천도가 새로운 농작지를 늘려서 백성의 삶을 개선하기 위함 ... 이라는 것이 제시되는 유일한 개혁의 정당성인데, 이건 좀 많이 뜬금없더군요. 말하자면 정조의 화성천도가 조선시대식의 지역균형발전 노력이었다는 것인데.. 이건 좀 아니죠 화성이 뭐 어디 먼 곳도 아니고;; 노통의 천도노력과 연결시키면서 노통=개혁군주 정조 한나라당=노론 세력 이런 정치적 해석을 가미하고 싶었던 티가 팍팍 나는데 정치적 해석이야 창작자의 맴이지만 화성천도를 행정도시와 연결시키는 건 영 아니올시다 네요.

특히, 매회 '백성의 삶은 매년 나빠지는데.. 개혁은 뜻대로 되지않고.. 조선의 미래는...' 류의 대사가 반복됨으로써, 정조의 고민하는 진정성을 전달하고자 하는 것은 좋으나.. 과연 드라마에서 그리는 것처럼 정조시대 백성의 삶이 최악이었고 지주와 관리의 착취를 전혀 막지 못했다면, 도대체 정조가 왜 뛰어난 임금이란 거냐 라는 물음이 제기될 수밖에 없죠. 본의아니게, 고민만 하고 개혁은 다 막힌 무능한 임금으로 그려지고 있는 거죠. 실제로 영정조 시대 백성들의 삶은 그 이전 시기나 그 이후 시기에 비해 훨씬 양호했고 그래서 두 임금이 평가받는 것인데.. 임금을 띄워주려고 '고민'과 '개혁의 어려움'을 강조하다 보니 앞뒤가 뒤집혀 버리게 된 거죠.

'이산' 에서도 제가 보기에는 상당히 어이없는 대목이 그런 부분이었는데.. 영조 앞에서 세손(정조)이 과감하게 "벼슬아치들이 벼슬을 사고 팔고 그것을 백성들의 착취로 메우니 도탄에 빠진 백성들의 삶은 매년 더 어려워지기만 하고... 어쩌고.." 라고 말하니, 도열한 고관들은 핵심을 찔려 화들짝 당황하고 놀란 표정을 짓고, 영조는 좀 긴장하지만 흡족한 표정으로 세손을 칭찬하며 대신들을 꾸짖고.. 드라마에선 이 대목이 세손의 영명함을 표현하는 일화로 나오는데 제가 보기엔 좀 어이없었거든요. 임금 앞에서 세손이 임금의 치세를 정면으로 폄하하고 부정하는 발언을 하는 것인데;; 뭐 할 수도 있겠지만 이런 건 일부 신료들의 탐욕이 성심을 가리어 어쩌구 하는 식으로 완곡하게 말해야지. 

하여튼 우리 나라 사극의, '백성들은 도탄에 빠지고' 만 읊어대면 착한 사람인 것으로 묘사되는 상투성이 맘에 안듭니다. 

이런저런 면에서 지금 방영중인 바람의 화원은 많이 낫더군요. 정조도 신권 앞에서 무력하지만은 않은 강단있는 임금으로 나오고.

아 그리고 .. 드라마 상 어쩔 수 없는 부분도 분명히 있겠지만 조선 시대의 신분제를 너무 현대적으로 표현하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대장금도 그렇지만.. 이른바 퓨전 드라마들에서 특히, 이거 뭐 대비 앞에서 관비며 무수리들이 툭하면 고개 빳빳이 쳐들고 말대꾸에, 내기를 하자고 하질 않나, 대감이 좌정하고 있는데 노비가 발칵 문을 열고 뛰쳐들어오질 않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