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ASEBALLPARK

어제 일입니다. 대화내용은 물론 저렇게 깔끔하지는 않았겠지만 무슨 녹음기록이 있는것도 아니기때문에 기억나는대로 나름 자세히 정리했습니다.

2주전쯤 혼자 명동의 한 식당에서 밥먹고있는데 누가 알아보고 말걸길래 봤더만 초등학교동창이더군요. 그녀석과 술한잔하고, 그걸 계기로 줄이 이어져 서울 모초등학교 6학년2반 동창회에 나가게 됐습니다. 인터넷시대 인트로시절 즈음 아이러브스쿨 유행할때 한번 나가보고 처음이니 8년만이네요.

8년전에 봤던 멤버들, 졸업 이후 처음보는 멤버들, 실례지만 누구..?싶은 멤버들, 대략 스무명가까이 모여 왁자지껄 떠드는 분위기속에서 뭐 딱히 어색함같은 분위기는 없었습니다. 기억 잘안나는 친구라도 별로 문제될게 없더군요. 그냥 코흘릴적 기억을 공유하고있다는 자체만으로 상호 의미있는 존재라는 느낌, 나쁘지 않았습니다.

인원이 많다보니 점차 앉은 위치별로 대화에 그룹이 형성되기 시작했는데, 제가 속한 그룹에서는 중간중간 혈액형 얘기가 섞여나오기 시작했습니다. 뭐 내가 너 X형인줄 알았으면 초딩때 안좋아했을거라는둥, 그자리에 없는 다른 동창들 혈액형 맞추기놀이, 본인의 혈액형별 연애담과 혈액형별 직장상사 얘기 등등 간간히 섞여 나올때는 그냥 같이 킬킬거리며 그러려니했습니다. 근데 갈수록 그게 메인화두가 되는가싶더만, 어떤 녀석 하나, 초딩때 남자애들 꼬집을때 악랄하게도 주로 긴손톱을 사용해 손톱마녀라 불리던 녀석 하나가 아주 신나서 최전방으로 치고나가 줄창 혈액형별 성격론에 대해 장황한 경험담을 늘어놓기시작합니다. 얘기 끝나고 화제가 전환됐다싶으면 또다시 어떻게든 혈액형과 연관지어 단독드리블로 치고나가기를 수차례, 슬슬 짜증이 나더군요. 제가 사실 평소에는 주위사람이 혈액형 얘기를 하면 좀 맥을 탁탁 끊어버리곤 하는편입니다. 친한사이라면 덜떨어져보인다는 막말과 함께 최소한의 교양은 갖추자는 식의 기분나쁜 훈계를 하기도 하지요. 근데 그날은 기분좋은 동창회고, 그리 편한사이도 아니고 하니 그럴순없고 그냥 웃을때 같이 웃고 그러고있다가, 신나게 혈액형복음을 전파하던 손톱마녀가 급기야 제 혈액형을 물어오더군요.

- 나? 몰라 까먹었다

- 하하하.. 너 비형이지? 보통 비형들이 주로 써먹는 멘트잖아 그건 ㅎㅎ

초딩때 검사한게 맞다면 실은 전 O형일겁니다만.

- 비형이 젤 안좋은 피냐?"

- 아니뭐 안좋다기보다는.. 좀 그런면들이 있다보니 비형남자들이 좀 혈액형얘기 싫어하잖아 ㅎㅎ

- 글쿤

- 맞어?

- 까먹었대두

- 하하 맞나부네

그렇게 저는 일단 비형이 된채로 넘어갔습니다.

근데 이후 중간중간 제가 제 살아가는 얘기를 할때마다 "역시 비형" 또는 "비형 맞아?" 같은 추임새를 나름 개그랍시고 구사하던 손톱마녀가
결정적으로 사귀는 여자 있냐는 질문에 제가 얼마전 애인과 헤어졌다는 대답을 하자 그 헤어진 여자의 혈액형을 묻더군요.
그순간 그만 이런말이 튀어나왔습니다.

- 넌 초딩땐 참 똘똘하고 야무졌었는데 말이다

- 응?

- 난 오랜만에 나와서 모르겠는데 너 초등동창회라서 초등수준으로 노는거냐 아님 원래 이러냐

싸아해지더군요. 
말자체가 냉소적이기도했지만 그나마 좀 웃으면서 이말을 했다면 무난한 농담이었을텐데 아마 표정도 시리어스했을겁니다. 뭐랄까 관성적으로 튀어나온 습관적인 냉소였습니다. 그럴자리는 아니었는데 말이죠.

- 아.. 기분 나빴어?

- 그애 혈액형 알아서 뭐할려고. 또 나랑 걔랑 피궁합이 안맞아서 깨졌다는둥 그런얘기 할려고했던거냐

- 아니 그냥 물어본건데.. 정색을 하고그래. 암튼 미안해 난 그냥 니가 아무렇지않게 얘기하길래 그정도는 물어도 되겠지싶어서 물어본거야. 얼마전에 헤어진건데 내가 좀 경솔했다

이쯤에서 저도 싸가지없이 말한거 사과하고 끝냈으면 됐을텐데, 이미 전 관성에 몸을 맡긴 상태였습니다.

- 아니 그런 문제가 아니라. 그래 일단 내가 말을 좀 재수없게하긴했는데, 거짓말 좀 보태서 너 오늘 지금 한시간반동안 혈액형얘기만 했다. 나이 서른에 간만에 만나서 뭔짓이냐 이게. 애들도 아니고..

그쯤에서 이녀석도 화가나는 모양이더군요.

- 그래? 미안하다 유치해서. 근데 비형들이 혈액형얘기에 과민반응하는것도 만만찮게 유치해보이는거 알아? 그냥 웃어넘기면 될걸..

- 으크크크크

- ?

- 정말 내가 비형이라 이런다고 생각해?

- 아님 말고

- 솔직히 말할게. 8년만에 만난 너에대해 내가 오늘 한시간반동안 받은 인상은, 무지 없어보인다는거야.

- 자꾸 말 그런식으로 할거니? 단지 혈액형 얘기 좀 했다고 별얘길 다듣는다?

- 말은 바로하자. 니가 '좀' 한건 아니지

- 그냥 재밌자고 하는거잖아. 니말대로 8년만에 만나서 니가 나에대해 알면 얼마나 안다고.. 넌 원래 이런걸로 사람 판단하니?

손톱마녀의 언성이 살짝 높아졌고, 저는 다른 친구들이 말리려고 개입하는건 신경쓰지않고 받아쳤습니다.

- 너 말한번 잘했다. 내가 너 한시간 반 겪어보고 없어보이네 어쩌네하는거, 어이없지. 그럼. 어이없고말고. 인정해. 미안하다.
근데 그게 어이없다는걸 알면서 사람을 아예 겪어보기도전에 단지 항원항체종류로 그사람이 소심쟁이네 다혈질이네 괴팍하네 바람둥이네 변덕심하네 어쩌네저쩌네 판단하는 스스로에 대해 위화감 못느끼냐?

- 정말 말 웃기게한다. 그냥 반은 재미로 하는거지 누가 판단씩이나 한다그래?

- 그느므 반은 재미라는 얘기도 지겹다. 반은 재미라는게 정확히 뭔소리냐. 재미면 재미고 진지한거면 진지한거지 반만 재미라는건 뭔데?
말 애매하게 애둘러할거없고 너 솔직히 말해봐. 어떤사람 혈액형 알게되면 일단 그사람은 어떠어떠할거같다라는 생각 해 안해?

- 그러니까 그게 확신이 아니고 그냥 그런 경우가 많으니까 대충 짐작으로..

- ..짐작으로건 뭐건 암튼 저사람도 무슨형이니까 이러이럴거같다, 그런생각 하잖아 결국. 그럼 그건 재미가 아닌거야. 이미 판단을 하고 선입견을 갖는건데 재미는 무슨 재미야

- 그러니까 그 판단이라는게 진지한게 아니라 반은 재미라고.

- 그거 말장난이라니까그러네. 반은 재미라는건 없어. 그런 선입견을 갖느냐 안갖느냐 둘중 하나야. 선입견을 조금이든 많이든 가지면 진지한거고 전혀 안가지면 재미인데, 정말 그런 선입견을 조금도 안갖는다면 니가 한시간반동안 줄창 혈액형 얘기를 하겠냐?

- 선입견이 아예 없다면 거짓말이긴한데, 누가 그걸 백프로 믿는대? 당연히 틀릴수도 있다고 생각해. 하지만 분명 맞는경우가 많고 그런 경험때문에 선입견이 조금 생긴다면 그건 어쩔수없는거잖아?

- 어떤사람들은 이런 말을 하지. 전라도 사람은 성질도 개같고 사기도 잘친다고. 물론 예외도 있고 틀릴수도 있지만 대.체.로 지들 경험상 그렇다고.  자, 지금 이말이 반은 재미로 들리냐?

- 재미인지 아닌지는 말하는사람이 알겠지만 그런 말 하는 사람의 실제경험이 그랬다면 어쩔수없잖아. 좋은 선입견은 아니지만 본인 경험때문에 그런 선입견 생기는걸 누가 뭐랄수는 없는거 아냐? 그리고 혈액형으로 누가 사기잘친다고까지 생각하니? 그런 극단적인 선입견은 없잖아. 비교 할걸 해

- 요점은 선입견을 갖느냐 갖지않느냐의 문제에서 '반은 재미'라는건 없다는거야. 백프로 확신하지않고 예외의 가능성을 둔다고해서 그게 반이 재미가 되는건 아니란말이다. 완전히 믿건 예외를 인정하건 어느쪽이든 이러니저러니해도 결국 선입견일뿐이라는거야. 그것도 근본도없는 허접한 근거에 기댄 멍청한 선입견.

- 니가 안믿는다고 멍청하네 허접하네 그런얘기 좀 심하지않아?

- 허접하고 멍청한게 사실인데 어쩌냐그럼. 넌 만일 내가 키큰사람은 야무지지못하고 입큰사람은 입이 가볍다는게 내 경험상 어느정도 맞다면서 한시간반동안 떠들어대고 니가 사귀던 애인의 키나 입크기를 물어보면 안멍청해보이겠냐?

- 그렇게 아무 예나 막 갖다붙힌다고 비교가 돼? 혈액형얘기를 나만 하니? 너 오늘 혈액형 얘기 처음들어? 대부분의 사람들이 받아들이고 공감대가 있는건데 그럼 그 많은 사람들이 다 멍청하다는거야?

- 어. 다 멍청해. 그래서 신기하고.

- 그래 알았어 나 멍청하고 유치하니까 그만하자

이러고서 손톱마녀는 나가버렸고
저도 분위기 망친데 대해 책임을 느끼고 더이상 앉아있기뭐해서 그냥 나왔습니다. 물론 이 언쟁 전후로 다른 동창들이 말리고 가지말라하고 암튼 웃긴 상황들이 연출됐지만 그런얘긴 다 생략했구요.

여튼 이 빌어먹을 혈액형론 때문에 간만에 기분좋게 나간 동창회가 개판이 됐죠.

제가 잘했다고 쓰는글은 아닙니다. 사실 언쟁의 책임이 누구냐 하면 제쪽 잘못이겠죠. 손톱마녀는 그냥 그런 혈액형 얘기가 조금은 어색할수있는 자리에서 나름 분위기를 띄우는 본인방식이었을수도 있고, 것다대고 제가 정색을 하며 냉소하고 핀잔을 주고 훈계까지 했으니 전적으로 잘못은 제게 있는게 맞습니다. 좀전에 다른친구에게 물어 연락처를 얻어 전화해 사과도했구요.

다만 다시 한번 느꼈습니다. 이젠 혈액형별 성격론에 대한 일부의 믿음은 터치하기도 어려운 맹신수준이구나라는걸 말이죠. 종교논쟁은 피하듯이, 이젠 혈액형성격론에 대한 논쟁도 피해야겠구나, 대화가 안되는구나라는 생각을 하게됐습니다. 제가 여기서 말하는 맹신이라는건 A형=뭐 B형=뭐 라고 두부자르듯 확고히 규정하는걸 말하는게 아닙니다. 설마 그런사람이야 정말 거의 없을테고 있다면 그건 일종의 악성 편집증으로 전문의의 치료마저 요구되는 케이스일겁니다. 제가 말하는 맹신은, "경우에따라 틀릴수는 있지만 그래도 어.느.정.도.는 맞다"는 명제에 대한 맹신을 말하는거죠. 일부 혹은 상당수 사람들은 확실히 혈액형성격론을 <절대적이진 않으나 매우 참고할만한 상식> 정도로 인식하고있고 실제 인간관계에 적용해 나가는듯 보입니다. 확실한건 별자리 수준의 믿음이 아니라는거죠. 물론 손톱마녀 말대로 "전라도 사람은 사기꾼이다"라는식의 극단적인 선입견과는 다를수도 있으나, 사실 혈액형별 성격론이라는것도 가만 들여다보면 어떤 타입이건 대부분 부정적인, 마이너스적인 선입견들이지 않습니까? 게다가 심지어 좋은피, 나쁜피라는 우열의 개념마저도 형성되는게 문제구요. 정말 이게 "재미"이려면 어떤 혈액형이건 서로 좋은 말 해주고 서로 좋은 선입견을 갖는 재미라면 굳이 문제삼을 필요없겠지만, 그게 그렇지 않으니 자꾸 태클을 걸고싶어지는듯합니다.

결론은 그리 친한 사이가 아니라면 이젠 더이상 혈액형 얘기한다고 핀잔줘서는 안되겠다는거 정도네요.
물론 친한 주변사람이 그러면 제가 같이 다니기 쪽팔려서라도 계속 갈굴 생각입니다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