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ASEBALLPARK

닉넴을 '가짜수의사'에서 '아카사카_시나몬'으로 바꿨더니,
갑자기 하루키가 다시 읽고 싶어졌어요.

하루키를 알게 된 지도 벌써 13년이 됐네요.
대학 1학년때 우연히 장정일의 '독서일기'를 읽다가 이런 글귀를 본 게 시초였죠.
장정일이 [국경의 남쪽, 태양의 서쪽]을 읽고 딱 한 줄 남긴 내용인데,

'무라카미 하루키, 그는 힘이 쪽 빠졌다.'

어린 마음에, 그럼 대체 힘이 있을 때는 어떤 작가였는지 궁금해서
서점 한 구석에서 데뷔작인 [바람의 노래를 들었다]를 사서 읽기 시작했어요.
(우리나라에서는 [상실의 시대]가 인기를 끌기 시작했는데, 좀 의외죠.)

그렇게 시작한 하루키에 푹 빠져서
한 2년 동안 줄창 읽고 또 읽고...
20대 초반을 그렇게 보냈네요.
동아리 선배들은 '하루키는 위험해'라며 말리기도 했지만...흠.

2000년이 지나고 어느덧 졸업하고 입사하면서
상대적으로 '최신작'은 사서 읽긴 했어도
20대 초반에 느꼈던 신선함은 많이 사라졌었는데,
엊그제 문득 서재에서 뽑아 읽은 [해변의 카프카]에 다시 마음을 빼앗겼어요.

힘이 빠졌어도, 하루키는 하루키.
20대의 대부분을 저당잡힌 탓에
하루키를 읽으면 어쩐지 그때로 돌아가는 것 같아서,
기분이 묘해요.

찾아보니, 3년 전 봄에도 이런 글을 끄적인 적이 있네요.
앞부분은 회사 얘기라 지우고 올립니다.

*이하*




봄이다. 고층빌딩 사이를 훑는 칼바람 때문인지 여의도보다는
벚꽃이 힘이 없어 보이기는 하지만, 그래도 봄이다. 스물 아홉 번째 맞는 봄. 그러나,

내 기억에 가장 선연한 봄은 1995년의 봄이다.
열 아홉살. 대학 1학년의 신입생. 이제 '하고 싶은 것'만 공부하고 살아가겠다고
무모한 다짐을 하던 그때.

무라카미 하루키라는 작가를 알게 됐다.
떨리는 마음으로 찾아간 비평 동아리에서,
선배들은 마치 마약이라도 대하는 듯 '하루키를 조심해라'며
그렇잖아도 청개구리 습성을 지닌 나를 자극했다.
교과서가 아닌 책을, 교실이 아닌 곳에서 읽고 싶었던 나는
마침 '파볼 만한' 작가를 찾고 있었다. 그때 하루키가 걸려들었던 것이다.

그 봄. 매일 왕복 2시간씩 걸리는 통학 전철과,
친구를 기다리는 카페와, 공강 시간의 야외 벤치에서,
나는 하루키를 읽었다. 그건 틀림없이,

새로운 세상이었다. 하루키의 주인공들은 깔끔하게 비정하고,
매끄럽게 사랑하고, 문득 사라져 뒤를 돌아보면 아무 흔적도 없는 표표한 인간들이었다.
그건 하루키를 얘기하는 많은 사람들이 스스럼없이 쓰는 단어처럼,
단순히 'cool함'과도 다른 것이었다. 적어도 내게는 그랬다.

지금도 내 방 책장의 한 층은 하루키의 책이 메우고 있다.
어제 잠들기 직전, 문득 그 책들이 눈에 들어왔고,
다시 한번 나에게 '읽혀 지고 싶다'는 녀석들의 속삭임이 들렸다.
1995년의 봄과 2005년의 봄. 그 10년의 시간동안 나도 꽤나 변했을텐데,
그 녀석들을 하나씩 펴들면, 다시 그때처럼 순수하게 감동하게 될까, 아니면 마치
보도자료를 읽듯 아무런 여유도, 감흥도 없이 술술 책장이나 넘기게 될까.

무라카미 하루키는, 올해 56세쯤 됐을거다. 도저히 인정할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