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득 떠오른 죽은 시인의 사회
- 작성일
- 09-09-24 19:53
무려 89년 영화... 그땐 저도 한참때라 사실 이 영화를 그다지 진지하게 보지는 않았습니다.
다만 몇 가지는 정말 가슴에 와 닿았습니다.
첫째가 대체 영화 제목을 어떤 시러배가 이딴 식으로 번역했냐는 비난들... 저도 비난하던 축이었지만 제 안은 "죽은 시인 결사" 또는 "죽은 시인會"였습니다. 실제 영화의 자막에서도 처음 이 모임의 결성 당시 "비밀결사"에 대한 얘기가 나옵니다.
좀 더 서정성을 살리고 싶다면 "죽은 시인들"이라거나 "시인이 죽은 나라" 뭐 이딴식으로 응용도 가능했겠지만... 사회... 정말 아스트랄하고 깊은 고민을 하게 만드는 단어 선택이었죠. 저도 원제목을 몰랐던 최초 관람 때는... 이 사회가 시인이 죽은 것만 같다고 지적하고 싶었나보네 싶다가... 영화를 보다보니 영 이상하더군요.
여튼 이 논란이 당시 친구들 사이에서도 많았기에 기억이 나네요.
두번째로 기억에 남는 건 아래 인용하는 토드의 시입니다.
전, 전, 시를 안 썼어요.
앤더슨군은 자신의 내면에 있는 것은
모두 가치 없고 수치스럽게 보는군.
안 그런가? 그게 네 두려움이야.
난 네가 잘못됐다고 생각한다.
네 내면에는 매우 가치있는게 들어 있다.
'나는 야성을 지르노라'
'나는 이 세상 지붕 꼭대기에서 '
다시 휘트먼 아저씨 말이야.
자, 여기서 야성이란 커다란 울부짖음이다.
자, 토드군. 이리 나와서 우리에게
야성이 무엇인지를 보여주게.
어서. 앉아서는 야성을 보여줄 수 없지.
일어서. 어서 앞으로 나와.
야성 자세를 취해라.
어, 야.
아냐, 그냥 야가 아니라 야!
야.
더 크게.
야.
쥐새끼 소리만 하다. 더 크게 해.
야!.
이런, 더 사나이답게.
야!!!
바로 그거야. 네 내면에도 야성스러운 면이 있어.
벌써 들어가면 안되지.
저기 휘트먼 아저씨의 사진이 있다.
저 사진이 뭘 연상시키나 말해 봐.
생각하지 말고 그냥 말해.
미친 사람.
어떤 종류의 미친 사람?
생각하지 말고 생각나는 대로 대답해.
정신나간 미친 사람.
오, 더 나아지는군.
마음을 열고 상상력을 펼치고
머릿속에 퍼뜩 떠오르는 걸 얘기해.
그게 바보 같은 얘기라도 좋아. 어서 말해 봐.
땀에 젖어 이를 드러낸 사람.
좋아. 잘했어. 너한테도 시적인게 있구나!
자, 이번엔 눈을 감아. 눈을 감아.
눈을 감아. 감고 뭐가 보이는지 말해라.
눈을 감았습니다.
그리고?
그의 모습이 내게로 와요.
땀에 젖고 이를 드러낸 그가.
땀에 젖고 이를 드러낸 그가 나의 뇌를 노려보고 있어요.
오, 훌륭해. 그에게 뭔가를 시켜봐.
뭔가를 시켜보라구.
그의 손이 뻗어와서 내 목을 잡아요.
그렇지, 훌륭해, 아주 좋아. 계속해.
계속 뭔가를 중얼거립니다.
뭘 중얼거리고 있지?
진실을 중얼거리고 있어요.
그래.
진실은 발을 차갑게 하는 이불 같은 것입니다.
(아이들의 웃음)
무시하고 신경 쓰지 마.
이불 얘기를 계속해봐.
잡아당겨도 늘어뜨려도 이불은 부족합니다.
무슨 수를 써 봐도 이불은 우릴 덮어주질 못합니다.
울면서 태어난 날부터 죽음으로 떠나는 날까지
울고 절규하고 신음하는
우리의 얼굴만을 덮을 겁니다.
(고요해졌다가 박수를 보내는 아이들)
오늘 수업을 기억해라.
인간은 죄를 짓습니다.
전 그게 최악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어쩌면 배울 기회도 되기에 죄의 유혹과 실수는 상당히 괜찮은 면도 있습니다.
정확히 말해 최악은 죄를 짓고도 부끄러워 하지 않는 것이죠.
차가운 발은 드러내놓고 얼굴만을 가린 채 부끄러워 하는 현실, 그것은 토드에게 끔찍한 현실이었겠지만 그가 건강한 인간임이 진실이라고 반증하겠죠.
누군가는 가족이 뇌물을 수수해 그 진실의 부끄러움을 견디지 못해 괴로워하다 얼굴마저 채 가리지 못하는 갈기갈기 찢어진 이불을 끌어당기다 그만 삶을 마감하는가 하면...
누군가들은 위장전입이니 탈세니 병역기피니 자녀 외국국적 취득이니 온갖 범죄와 부도덕한 행실에도 당당히 고개를 쳐들고 더욱 더 부와 권력이 커지며 잘 살아갑니다.
저도 돌아보니 적잖은 나날 살아오면서 죄가 많고 허물이 많았습니다. 남의 어려움을 보고도 모른 체도 했고 제게 먼저 엿 맛을 보였다는 이유로 잔인하고 교활하게 보복을 가한 적도 꽤 있습니다. 불리한 사실을 숨긴 적은 대체 몇번인지도 모르겠고 결정적으로 너무 많은 세월을 사랑하지 않고 차갑고 건조하게 살아왔다는 사실까지... 부끄러운 일들이 너무 많습니다.
하지만 저도 이제 서서히 이불로 얼굴을 굳이 가리지 않아도 될만치 낯이 뜨거워지지 않게 되었습니다.
진실이란 이불은 최진실 씨 떠날 때 어딘가 길목에서쯤 떨어트렸었나 봅니다. 찾으러 갈 필요도 기력도 없습니다.
저으기 두렵습니다. 저도 죽은 무언가가 되어가나 봅니다. 순수를 잃고도 진실 앞에 떨 양심이 희석되고도 백주대낮을 잘도 얼굴 쳐들고 돌아다닙니다.
오늘 라디오에서 MC가 "착한 사람들이 대접받는 사회가 되었으면" 한다는 멘트를 날리더군요. 개소리 하지마라 싶었습니다.
착한 사람이 대접을 받으려면 우선 모든 이들이 물욕을 버려야 합니다. 그런데 모든 이들이 물욕을 버리면 모두가 착한 사람이 되어 버리기에 더 이상 착하다라는 변별이 없어져 버립니다.
결국 착한 사람이 대접받는 사회는 어느 시대 어느 나라에서도 이루어질 수 없는 모순된 바람입니다.
아 할 일은 많고 일 하기는 싫고 짜증만 나네요... 쩝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