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ASEBALLPARK

1.

지금도 그런 게 있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중고등학교를 다니던 시절에 내가 살던 아파트에는 짐칸을 개조해 도서관처럼 만든 소형 탑차가  일주일에 한 번씩 오곤 했었다. 나이 지긋한 어른들이 흔히 얘기하듯 '딱히 놀 거리가 없던 시절'까지는 아니어도 좀처럼 자주 갈 수 없었던 극장과, 해적판 테이프로 듣던 유행가를 제외하면 그나마 가장 자주 즐기던 여가 활동이 '책 읽는 것'이었던 나에게 매주 수요일이면 관리사무소 앞에 자리를 잡고 있던 그 탑차는 굉장히 반가운 존재였다. 그 '책차'(이렇게 불렀다)에는 학생인 내가 쉽사리 돈을 주고 구입할 수 없는 각종 잡지며 대중소설들이 가득 차 있어서 학교나 집에 있는 책 밖에는 달리 읽을 거리가 없던 나에게는 그야말로 보물창고였기 때문이다.

그 시절 권당 3백원이나 5백원을 주고 빌렸던 책들은, 지금에 와서 보면 중학생(혹은 고등학생)이 읽기에는 조금 부담스러운 책들이 아니었나 싶다. 부담스럽다는게, 어렵다거나 심오한 사상을 담고 있어서가 아니라, 무협지나 대하소설같은 길고 복잡한 이야기였기 때문이다. 김용의 무협소설은 있는대로 다 읽어서 14편 소설 제목의 첫 글자를 늘어놓은 '비설연천사백록, 소서신협의벽원(飛雪連天射白鹿 笑書神俠倚碧鴛)'과 같은 칠언절구를 책상 위에 적어 놓은 다음, 읽은 녀석에는 동그라미를 쳐 놓고 다음번 책차가 올 때는 안 읽은 녀석 가운데 이걸 봐야지, 하고 생각했었고, 중간 중간 섹스신이 묘사된 페이지가 뜯겨져 나가 있는 조정래의 [태백산맥]이나 김홍신의 [인간시장]은 페이지가 있거나 말거나 밥을 먹을 때도 늘 옆에 두고 말 그대로 '몰두' 해서 읽었다. 물론 유실된 부분은 덜 익은 상상으로 채우고.

'책차'의 단골이 되기 시작한 중학교 2학년 겨울에 푹 빠져서 읽은 책 가운데 김성종의 [여명의 눈동자]가 있었다. 이 책은 마침 열 권을 다 읽고 났더니 드라마로 방송되기 시작해서, 드라마와 비교해 보기 위해 다시 한 번 읽었을 정도로 인상이 깊었다. 김성종은 [제 5열](역시 드라마로 제작된 적이 있다)과 [국제 열차 살인사건]으로 유명한 추리소설가라고만 알고 있었는데, 우연히 손에 든 [여명의 눈동자]는 길고 긴 대하소설이었다. 열 권은 기본이던 무협지를 제외하고 우리 역사를 소재로 한 대하소설로는 태어나서 가장 처음 읽은 작품이 바로 [여명의 눈동자]였다. (여담이지만, 책을 두 번이나 읽고 내용을 비교해가며 꼼꼼히 챙겨본 드라마는, 솔직히 실망스러웠다. 지금에서야 그게 당연하다고 생각하지만.)

[여명의 눈동자]에 등장했던 수많은 인물 가운데, 가장 관심을 끌었던 인물은 단연 '장하림'이었다. 드라마 때문에 '장하림'하면 바로 연기자 박상원이 떠올라버리는 조건반사가 생겨버려서 아쉽기는 해도, 드라마가 없던 시절 [여명의 눈동자]의 '장하림'은 소설 속 허구의 인물로는 내가 가장 많이 생각하고 감정이입했던 인물이었다. 대학에 가고 나서야 소설 속 '장하림'의 모델이었던 장준하 선생에 대해 알게 되고, 회고록인 [돌베개]도 읽었지만, '장하림≒장준하'의 등식을 아직 몰랐던 중학교 2학년에게도 일제(日帝)라는 엄혹한 상황에서 이른바 '지식인의 고뇌'를 상징했던 장하림의 인생역정은 '생각해 볼 만한 거리'로 충분했다.

열네 살의 까까머리 중학교 2학년. 그럭저럭 공부에 재미를 붙이면서, 경쟁에서 이기는 것에 쾌감을 느껴가기 시작한 사춘기 소년에게 '지식인'이라는 단어는 '이대로 잘만 하면 내가 커서 될 무언가'라는 강한 암시를 주는 원천이었다. 지금 돌아보면 치기어린 자만이었고, 보상받을 길 없는 우월감의 함정이었지만, 적어도 그때는 그랬다. 그래서 책을 읽는 동안, 앞으로 '지식인'으로 살아갈 나로서는 선배 '지식인'들이 어떤 고민을 하며 어떤 삶을 살았고, 그 삶의 끝에 어떤 보상을 받고 어떤 후회를 했는지를 미리 엿보는 것은 상당히 중요하다, 고 생각했었다. 나라면 어떻게 했을까. [여명의 눈동자]를 다 읽은 이후부터 일제 시대와 해방 전후의 어지러운 역사를 보면 늘 드는 생각이었다.

물론 그 의문에 대한 결론(해답은 아니다)을 내리기 위해서는 다양한 설정이 정립돼야 했다. 그러나 설정을 세우기에는 옵션이 너무 많았다. 양반 출신과 노비 출신, 지주와 소작농, 도시와 시골, 그리고 내가 영향을 받고, 영향을 주는 수많은 주변 인물들...불확실한 선택지가 많아서 머리 속으로 일제 말기에 어렵게 나를 가져다 놓아도 그 속에서 좀처럼 무언가를 행동하기를 상상하기란 쉽지 않았다. 나는 독립운동을 했을까, 친일을 했을까, 그도저도 아니면 정치사(史)와는 아무런 관계없는 삶을 살았을까. 해방을 맞은 1945년에 어디서 무엇을 하고 있었을까. 이념이 큰 덩어리로 충돌하던 해방정국에서 심정적으로든, 행동적으로든 어느 편에 섰을까. 그 선택은 옳았을까. 선택의 옳고 그름을 떠나 그 결말은 어땠을까. 철이 든 뒤에야 실제 나의 삶은 그리 정치적이지도, 영웅적이지도 않은 '그저 그런 소시민'의 하나였을 거라는 결론으로 흐르게 되지만, 당시 나는 '앞으로 뭐가 됐든 뭔가 하지 않겠느냐, 그러니 역사를 뒤로 돌려도 마찬가지 선택을 해야 하지 않았겠느냐'는 생각을 갖고 있었다. 누가 뭐래도 이제 막 자기 밖의 세상을 비판적으로 보기 시작한 사춘기 열 네살 소년이었으니까.  그런 시절이었으니까.

2.

 얼마 전 신문에서 이병주의 유작(遺作) [별이 차가운 밤이면]의 출간 소식을 읽었을 때, 이 책은 읽지 않을 수 없다고 생각했다.  앞에서 언급한 대로 [여명의 눈동자] 이후, 나는 일제 말기부터 해방 전후기를 다룬 콘텐츠에 자석처럼 속절없이 끌려왔기 때문이다. 소설은 양반 지주의 혼외 서자로, 노비 부모의 밑에서 자신의 운명에 대해 씻어낼 수 없는 적대감을 갖고 자란 '박달세'라는 인물이 신식 교육을 통해 엘리트가 된 뒤 겪는 인간적인 고민과 좌절을 다루고 있다. 명문 오사카 고등학교를 거쳐 동경제대 법학부에 진학한 뒤 태평양 전쟁이 급물살을 타는 상황에서 다른 조선인 엘리트처럼 학병으로 징집당하기 직전에 조선총독부 고등경찰과장 쓰네요시의 눈에 들어 그와 함께 상하이로 가서 일본인 특무장교로 행세하게 되는 박달세의 인생 역정 곳곳에는 그 스스로 학병이었던 작가의 경험과 번뇌가 상당 부분 그대로 드러나 있는데, 그 고민의 색은 장준하의 [돌베개]나 김준엽의 [장정], 그리고 님 웨일즈의 [아리랑]과는 사뭇 다른 성격이다. 아이러니하지만, 그 점이 오히려 더욱 현실적이다. 소설의 플롯과는 별도로 박달세라는 허구적 인물의 생각이 미군 OSS의 지원을 받는 조선광복군 국내정진군(침투조)였던 장준하와 김준엽의 '극적인 삶'보다 더 '현실에 있을법 하기' 때문이다. 그 생각이란, 요약하자면, '조선의 독립과 자주에는 반대하지 않지만 그것을 위해 온몸을 바치기에는 그동안 쌓아온 기득권의 틀이 너무 아까워서 적극적인 행동에 나서지 못하는 지식인의 현실도피'로 요약된다. 물론 현실도피의 주체인 박달세가, 실은 일본인의 조종을 받으며 조선인의 독립운동을 감시하고 탄압해야 하는 최전방에 서 있는 아이러니야말로 이 소설을 이끄는 허구적 장치의 핵심 구조다.

6백 페이지가 넘는 장편이지만, 이 소설은 작가의 타계로 인해 끝내 미완으로 남았다. 한가지 특이한 점은 '나=박달세'의 1인칭 시점이었던 1부가 2부에서는 3인칭 시점으로 급변하는데, 1부가 나-조선(때로 일본)-학생의 세 꼭지점에서 이뤄진 얘기라면 2부의 서술은 박달세-중국 상해-일본군 장교의 삼각형으로 수평이동하기 때문에 선택한 변용인 것으로 보인다. 과문한 탓인지 소설 중간에 시점 변화를 겪은 일이 많지 않은 것 같은데, 처음 든 생각은 아무래도 계속 1인칭을 유지하기에는 스토리의 규모나 그에 따른 묘사가 쉽지 않았기 때문이 아닌가 하는 것이었다. 또 한편으로는 1인칭 시점을 통해 충분히 독자에게 설명을 했던 주인공이 어떻게 변해가는지를 좀 더 객관적인 시각에서 보려는 의도로도 읽힌다. 다시 말해 (작가 자신도 학병 출신의 '엘리트'였음을 감안하면) 1부 개인의 장에서 2부 공적 인간의 장으로 튀어나온 주인공에 대한 묘사를 객관화했다는 점에서 볼 때, 플롯 상에서 예정된 주인공의 변절, 혹은 번민에 대해 의도적으로 도피처를 만들려는 것이 아닌가하는 생각도 들지만, 그렇다고 작가를 비난할 수는 없다. 작가 이병주가 실제로 가졌던 고민의 크기를 내가 어찌 짐작이나 할 수 있겠는가.

작가의 변명인지 소신인지, 역시나 확인할 길도 없고 비판할 생각도 없지만 책에는 이런 부분이 나온다. 경성에서 쓰네요시 과장과 친분을 쌓던 박달세가 오사카 고등학교 동창생으로 친분이 있던 염길성의 여동생 염정희로부터 개인적인 '시대 통찰'을 듣는 대목.

항거해야 할 사정이 되면 항거해야죠. 항거하는 사람들을 존경도 하구요. 그런데 전 이렇게 생각해요. 우리 조선이 일본의 지배하에서 벗어나려면 기왕에 조선이 일본의 지배하에 들어가지 않을 수 없게 만든 모든 조건을 제거하거나 청산한 연후라야 가능하다구요. 그 조건 가운덴 우리의 노력만으론 어쩔 수 없는 지정학적, 국제정치적 조건도 있겠지만 우리 민족 내부에 있는 정신적인 결함도 있을 거예요. 그 모든 조건을 제거하거나 청산하지 못하는 한 일본의 지배하에서 벗어나지도 못할 것이거니와 설혹 벗어났다고 해도 별 볼 일 없을 겁니다. 그 예가 바로 우리 가까이에 있잖아요. 우리를 지배하고 있는 일본인의 꼬락서니를 보세요. 그들도 압제를 받고 있잖아요? 물론 조선인이 받는 압제보담야 덜하겠죠만. 한편 그들은 우리보다 더 심한 고통을 당하고 있지 않아요? 병정이 되어 전쟁터에 나가야 하는 사정 말예요. 그렇다고 보면 대체적으로 지배하는 족속인 일본인이나 지배당하는 족속인 조선인이나 대동소이한 것 아녜요? 일본의 지배를 벗어나 현재의 일본인보다 월등하게 잘살 수 있는 이법이 생긴다면 모르거니와 기왕 일본의 지배를 받게끔 된 조건, 특히 국민성의 내실이 그냥 그대로 시정되지 않은 채 남아 있다면 도루아미타불이다, 이 말이에요.(p.323-324)

 

자아 비판을 배경으로 한 수정주의로 폄하될 수도 있지만, 일제에 온몸으로 항거한 의사와 열사, 임시정부와 광복군 영웅들의 이야기 속에서 염정희의 논리가 갖는 의미가 결코 적다고는 할 수 없을 것 같다. 특히 '국민성의 내실이 그냥 그대로 시정되지 않은 채'로 맞게 된 해방 이후의 우리 역사가 어떻게 흘러갔는지, 그 대강이라도 알고 있는 입장에서라면 아프지만 고개를 끄덕거리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3.

작가가 타계하지 않고 계속 써 냈더라면 [여명의 눈동자] 못지 않은 길이와 [태백산맥]에 필적하는 임팩트를 우리에게 주었을지도 모르는 이 소설은, 한참 숨가쁘게 진행되다가 너무도 허무하게 끝나버린다. 그러나 오히려 갑자기 끊겼기에 이후 전개에 대한 상상의 여지도 생겨난다.

나는 사람이 되려고 애쓴 한동안을 가졌다. 그것도 보통 사람 이상이 되려는 불손한 생각은 아니었다. 그런데 그것이 불가능하다고 느꼈을 무렵엔 나는 사갈蛇蝎의 길을 가고 있었다. (...중략...)

사람이 될 수 없을 바에야 무엇이 된들 어떠랴. 나는 사갈을 닮으려는 작정을 했다. 그렇다고 해서 변명할 생각도 후회할 마음도 없다. 축생도畜生道의 선택은 타생他生에서만 가능한 것이 아니란 사실을 밝혀 두고 싶은 것뿐이다.(p.10)

 

이처럼 소설 도입부에 이 소설이 '박달세'의 회고록 형식이라는 것을 나타낸 것으로 보아, 박달세는 끝내 살아 남을 것이라는 가정을 할 수 있다. 인용된 부분을 보면 2부의 3인칭 시점에서 살아남은 박달세가 3부(혹은 그 이후)에 와서는 다시 1인칭 시점을 회복했을 가능성이 높다. 그러나 역시 도입부에서 자신의 일생동안 스스로 독사와 전갈의 길을 걸어왔다고 했으니 그가 어디에 있든 행복한 일생은 아니었을 것이다. 소설이 끝난(잘려버린) 시점은 1945년 초. 조금 뒤 여름이면 히로시마-나가사키의 원폭으로 일본 제국주의도 패망하게 되니, 박달세는 조선으로 다시 돌아가는 대신 중국인 '방세류'로 살아남지 않았을까. 거기에 가치관 상으로 달세가 공산주의자의 길을 걷지는 않았을 테니, 중국 공산혁명의 전화(戰火)를 피해 홍콩쯤으로 피신했을 수도 있겠다. 소설이 끝난 순간부터 훗날 퇴고록을 쓰기까지 어떤 인생을 살아왔기에 그는 이 세상에서마저 동물의 길(축생도)을 선택할 수 밖에 없었을까. 박달세의 인생 여정은 쉽게 일반화하기 어려운 학병 출신자들의 그것과도 크게 다르지 않았을 것이다.

조선인 학병은 실제로 약 4천 5백명에 이릅니다. 일본 본토 및 조선 내의 대학, 전문학교 학생이지요. 학병 거부자라든가 강제노동으로 끌어간 사람들을 제한 숫자입니다. 이들은 조선인으로서의 엘리트급에 속합니다. 졸업과 더불어 이들이 상류층에 편입될 것임은 새삼 말할 것도 없지요. 학병으로 갈 수 있다는 것은 계급상으로 보아 지배층인 셈이지요. 이들이 학병에서 탈출했다든가 묵묵히 병영 생활을 하면서 해방을 맞았지만, 해방 공간(1945~1948)에서의 국가 만들기에 중추적 몫을 했음은 두말할 것도 없습니다. 이들이 그러한 능력을 갖추게 된 것은 그들의 출신 계층의 힘과 일제의 교육의 힘에서 말미암았던 것입니다. (p.637 작품 해설 中)

 

출세의 사다리부터 절망의 씨앗까지, 일생동안 모든 각도의 스펙트럼에서 그들을 옭아매고 있었던 바로 그 '일본 제국주의 교육'은 과연 그들 학병에게 어떤 의미였을까. 그야말로 '정답이란 없는' 전환기 지식인의 역할을 누구보다 치열하게 고민하고 싸워 온 4천 5백 학병 출신들의 인생 앞에서, 우리는 과연 어떤 역사를 기억해야 하고, 어떤 교훈을 새겨야 하는가. 허전한 결말이 마음 속에 고요한 의문을 만들어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