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꼭 읽어볼 만한 글입니다. 꼼꼼히 읽으며 의미를 생각해보면 좋을 글이네요. 원론적인 이야기지만 우리에게 필요한 건 이러한 기본에 충실한 이야기이며, 우리에겐 이러한 기본에 충실해서 움직이는 것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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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쁨과 희망> 기고, 기본에 충실한 정치

외부기고 2009/12/27 07:51 최재천
                                  ▲ 기쁨과 희망 2009년 제4호, 기쁨과 희망 사목연구원 펴냄

정치를 경멸하는 일, 정치인을 걷어차는 일은 우리 사회의 ‘국민적 스포츠’입니다.
그럼에도 입신양명(立身揚名)의 결승점으로 정치를 꿈꾸는 사람들은 결코 줄지 않습니다. 우리사회의 모순입니다. 사법부의 판사는 성적순입니다.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하지만, 국회의원과 대통령은 시민의 직접투표입니다. ‘나라의 주인은 바로 나’라는 국민주권의 증거입니다. 그런데 도장을 찍고 투표장을 빠져 나오는 순간 곧바로 선택을 후회합니다. 민주주의에 대한 중대한 자기모순입니다.

우리 사회에서 여의도는 불편함의 상징입니다. 무능과 부패의 대명사이기도 하지요. 그래서 대권으로 표현되는 대통령을 꿈꾸는 정치인들은 스스로를 끊임없이 여의도와 차별화합니다. 이런 현상은 우리나라만의 현상은 아닙니다. 독일도 그렇습니다. 미국의 대선주자들도 일상적으로 워싱턴 정치를 비판하곤 하지요. 오바마 대통령도 그런 점에서 예외는 아닙니다. 우리나라도 마찬가지이지요. 노무현 전 대통령도 그랬고, 현재도 그렇습니다. 당선되기 전도 그렇고, 당선되자마자 자신은 정치인이 아니라며 여의도를 배격합니다. 여의도와의 차별화를 통한 나라사랑을 시민들에게 증명하려 합니다. 이는 견제와 균형의 원리를 주문한 헌법에 반합니다. 국회가 갖는 헌법적 대표성을 무시합니다. 역시나 모순입니다.

헌법을 만든 주권자인 시민은 정치라는 영역에 입법부와 행정부를 맡겨두었습니다. 삼권분립의 가장 중요한 핵심영역 두 가지를 정치와 정치인의 손에 위임한 것입니다. 그만큼 정치의 중요성을 인정하는 셈이지요. 물론 국민주권을 어떻게 실현할지에 대해서, 투표와 대표성으로 이어지는 정치행위 말고는 어떤 다른 방식으로 이를 추구할 것인지에 대해 다른 대안을 찾아내지 못한 점도 있겠지요. 그렇다고 아테네 시절 플라톤이 주장했던 귀족정치로 되돌아갈 수도 없고, 중세봉건시절의 귀족정치로 되돌아갈 수도 없고, 근대 시절의 엘리트 정치로 되돌아갈 수도 없다는 건 누구나 인정하겠지요.

그런데 문제는 바로 이 지점에서 출발합니다. 가장 중요한 정치의 영역에, 가장 중요한 문제를 위임해 두고도 정치를 경원시하고 외면해 버립니다. 시민의 주권행사를 투표라는 단 1회적 행위에 가두어 버립니다. 시민들은 종종 착각에 빠질 때가 있는 것 같습니다. ‘내가 투표장에 가서 도장을 찍었고, 시장경제가 작동하고 있는 이상 우리 사회의 민주주의는 어느 정도 이루어진 셈이다’라고 말입니다. 하지만 이는 ‘앙상한 민주주의’일 뿐입니다. ‘더 나은 민주주의’가 아닙니다. ‘더 많은 민주주의’가 못됩니다.

선거권 행사만을 주권으로 한정하고 다음의 모든 과정은 온전히 정치인의 몫으로 돌려버립니다. 정치인을 믿습니까. 견제하고 통제하지 않아도 괜찮은 장치인가요. 이쯤되면 정치인은 선거를 통해 위임받은 지위를 스스로의 노력으로 쟁취한 사적 권한으로 착각합니다. 권력을 일시적으로 위임받은 시민의 것이 아니라 타고난 자신의 권리로 오해합니다. 이렇게 자기합리화가 되고 난 이상 권력의 이기적인 행사는 전혀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시민의 무관심과 정치인의 자기합리화가 결합된 선물입니다.

물론 선거라는 제도가 있습니다. 대통령은 정치적 책임으로부터 자유로운 5년 단임제입니다. 국회의원에게 선거라는 수직적 책임은 4년 뒤의 일일뿐입니다. 더구나 선거는 회고적 특성과 전망적 특성을 동시에 갖고 있기 때문에 시민의 투표라는 주권행사가 어느 쪽을 지향했는지 확인하기도 결코 쉽지는 않습니다. 이를테면 이명박 대통령의 당선이 이명박 대통령의 경제살리기 비전에 대한 긍정적 전망이 어느 정도였고, 노무현 전 대통령의 행정부에 대한 회고적 비판이 어느 정도 비중을 차지했는지 솔직히 알아내기 어려운 일입니다. 그래서 학자들은 선거가 갖는 책임의 한계를 지적하곤 하지요. 한 가지 더 얘기하자면, 내일은 새로운 해가 뜨는 것처럼 4년이나 5년 뒤에는 지금과는 다른, 또 다른 바람이 불기 때문에 내일 일은 내일 염려할 일입니다. 이런 식으로 정치적 책임으로부터 자유로워지는 것이지요.

이런 과정을 거치고 나면 주권자인 시민의 역할은 어디에서 찾아야 할지 궁금해집니다. 참여라는 제도는 지극히 제약되어 있습니다. 집회와 시위의 자유마저도 질서라는 이름 아래 봉쇄되기 일쑤입니다. 여의도와 청와대에 대한 견제는 선술집에서의 안주에 불과합니다. 정치적 인상 비평의 대상일뿐입니다. 다른 한편 언론에 내맡겨두고 기자들이 알아서 잘 감시해 주겠지하며 편하게 생각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언론이 보여주는 대로, 언론이 써 주는 대로 받아들이고, 언론에게 사실의 중계 기능을 넘어선 여론의 독과점 형성기능을 부여합니다. 시민은 정치의 주체가 아닌 방관자로 밀려납니다. 주권은 불행한 소외의 길로 들어섭니다.

민주주의는 피를 먹고 자란다는 말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이것은 옛말이지요. 왕정을 타도하거나 군부독재를 깨뜨리는 과정에서 시민의 저항은 치열했고, 시민을 향해 총칼질을 해대던 시절이 있었습니다. 21세기의 민주주의는 악의적 무관심을 가장 두려워합니다. 단지 1회적 투표행위만으로 시민이라는 명예로운 권한을 행사했다고 말할 수는 없는 법입니다. 법의학적 표현을 빌자면, 부작위(不作爲)에 의한 안락사입니다. 노약자에게 산소나 영양분을 끊임없이 공급해 주고 관리하고 감독해야 하는데, 이를 게을리해서 사람의 생명을 어려움에 처하게 하는 것과 다를 바 없습니다.

이제 우리는 정치에서도 희망을 찾아야 합니다. 희망은 만드는 일입니다. 창조행위입니다. 희망을 만들 수 있는 유일한 노동자는 바로 시민계급입니다. 어떻게 만들어야 할까요.

첫째, 여론이 아닌 공론의 과정을 통해 정치와 권력을 끊임없이 견제하고 참여해야 합니다. 정의와 공공선에 기반을 두고 주권자인 시민들이 공통의 가치를 추구하는 행동에 나서야 합니다. 스스로의 권리를 투표행위에 한정해서는 안됩니다. 헌법이 보장한 표현의 자유, 정치적 자유를 통해 스스로 공통의 비전을 추구해야 합니다. 우리 사회의 고질적 질환인 학벌주의와 지역주의, 혈연의 패밀리로 이어지는 밤의 문화를 청산해야 합니다. 그래야만 공정성이 실현됩니다. 이런 기준을 바탕으로 공론의 장을 통해 끊임없이 토론하고, 정치행위를 시민의 공론에 종속시켜야 합니다. 벤자민 바버가 말한 ‘공적 시민’이 되어야 합니다. 서로가 공유할 수 있는 공통의 열망이 무엇인지를 토론하고 논쟁하며, 공공선을 실현하기 위해 활동하는 시민을 말합니다.

이런 공적 시민의 층이 두터운 시민 사회가 움직이는 민주주의를 ‘강건한 민주주의’라고 했습니다. ‘앙상한 민주주의’, ‘나약한 민주주의’에서 ‘튼튼한 민주주의’로 옮겨가야 합니다. 세계의 모든 학자들이 시민적 참여의 붕괴를 이야기하고 있고, 민주주의에 대한 열정의 상실을 얘기합니다. 열정이나 공동체에 대한 관심과 애정은 민족주의와 종교진영의 포퓰리스트들의 몫이라는 비아냥마저 있습니다. 공화주의에 대한 분명한 관심이 시작되어야 합니다. 공론을 통해 공통의 가치를 추구하고, 공화주의 이념을 통해 민주공화국의 이상을 실천하는 시민이 되어야합니다.

둘째, 우리 사회는 발전과 성장을 혼동합니다. 현대 사회의 모든 위기를 경제의 위기라며 단순화합니다. 경제가 무너지면 우리 사회 전부가 무너지는 것처럼 생각할 정도입니다. 경제우선주의요, 시장우선주의입니다. 경쟁우선주의입니다. 인간의 존엄이라는 본래적 속성을 시장의 우상 앞에 제물로 바치는 꼴입니다. 오로지 경제성장만이 살 길이라고 생각합니다. 안정과 분배와 성장의 조화가 곧 경제발전이라는 공식은 관심 밖입니다. 삶은 곧 경제고, 경제는 곧 성장입니다. 그래서 교황 바오로 6세께서는 1967년에 발표한 회칙 『민족들의 발전』을 통해 의문을 제기합니다. 우리 사회의 발전은 “덜 인간적인 조건에서 더 인간적인 조건으로 옮겨가는 것이라면 무엇이든” 추구해야한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발전의 기준은 오로지 ‘인간적’인 데에 있습니다. 무엇이 인간을 좀 더 인간답게하고, 어떤 발전이 인간을 더 자유롭게 하는가를 확인해야 합니다.

“이윤을 경제적 진보의 핵심 동기로, 경쟁을 경제의 최상위법으로, 생산수단의 사적 소유를 아무런 제한이나 사회적 의무가 없는 절대적인 권리로” 삼는 경제체제는 인간을 섬기는 경제체제로 바뀌어야 한다는 것이 그분의 말씀이셨습니다. 우리는 신자유주의에서 탈출해야 합니다. 한국판 출애굽기를 써 나갈 때입니다.

셋째, “우리는 계속되는 형벌과 괴롭힘을 통해 백성들의 정신을 계속 긴장시키고, 공포에 사로잡히도록 하는 것이 공화국이나 군주에게 얼마나 해로운지 잘 알고 있다. 의심할 여지없이 이보다 더 해로운 정치는 없을 텐데, 왜냐하면 자신이 피해를 당하고 있다고 생각하기 시작한 사람은 어떤 수단을 써서라도 위험을 피하려 하며, 또한 새로운 수단을 강구해 내는 데 훨씬 대담해지고 덜 주저하게 된다.” 마키아벨리의 『로마사 논고』에 나오는 말입니다. 법과 질서가 통치목표가 될 수는 없습니다. 그래서는 결코 안됩니다. 법과 질서는 인간의 자유를 위해 봉사하는 수단이자 도구일뿐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대한민국 정치와 정치인은 시민의 의사에 좀 더 철저히 종속되어야 합니다. 헌법이 정한 기본권의 가치에 좀 더 충실해야 합니다. 통치의 효율적 수단으로서 법과 질서를 활용하는 방식은 대단히 위험합니다. 1970년대의 국가주의 시대로 되돌아갈 수는 없는 법입니다. 정치에 대한 신뢰 상실, 정치에 대한 절망 등 이런 부분에 대한 절반의 책임은 직접 정치를 담당하는 대의정치권의 몫입니다. 좀 더 낮아지고, 좀 더 겸손해지고, 좀 더 어린이의 마음으로 되돌아가야 합니다. 이렇게 묵상할 일입니다.

“그 때에 제자들이 예수께 와서 ‘하늘 나라에서는 누가 가장 위대합니까?’하고 물었다. 예수께서 어린이 하나를 불러 그들 가운데 세우시고 ‘나는 분명히 말한다. 너희가 생각을 바꾸어 어린이와 같이 되지 않으면 결코 하늘 나라에 들어가지 못할 것이다. 그리고 하늘 나라에서 가장 위대한 사람은 자신을 낮추어 이 어린이와 같이 되는 사람이다.(마태오 18, 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