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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도 모르는 사실입니다만...

얼마 전, 할머니가 아프다는 소식에 병원을 다녀왔습니다. 이미 팔순을 넘으신 할머니이기 때문에 아프다는 이야기를 듣지 않는 게 더 신기한 일이겠습니다만...우리 할머니의 경우, 제가 장난으로 ‘사실은 구미호 아니야?’라고 말할 정도로 엄청나게 정정하셨습니다. 젊은 것들의 정기를 받아서 건강에 이상이 없는 거 아니냐고 말할 정도로 말이죠.

그 말 대로, 아들들뿐만 아니라(아버지의 형제는 4명) 가세가 기운 뒤 손자들까지 학창시절에 뒷바라지를 모두 하실 정도로(아버지의 형제들의 자식들은 모두 저를 포함한 6명) 건강하셨죠. 그러면서도 매일 산에 오르시고 배드민턴 모임에서 회장을 하실 정도로 리더십도 있으셨었습니다. 할아버지가 돌아가셨을 때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그 뒷수발을 다 하신 할머니셨습니다. 장례가 끝나고 모두 지쳐서 감기에 걸리고 골골댈 때 혼자서 멀쩡하셨던 모습이 아직도 눈에 선하네요.

그런데..갑자기 아프다고, 병원에 입원하셨다고 하시에 ‘할망구, 또 시답잖은 감기나 걸렸겠지, 근데 웬 병원? 왜 생전 안하던 유난을 떨어?’라는 생각을 하면서 강동성심병원으로 향했습니다.

그리고, 저는 거기서 예전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허리가 굽고 작아 진 할머니를 보게 되었습니다. 말로는 괜찮다고 하시지만, 이제는 뼈만 앙상하게 남은 할머니의 모습에 가슴 한편이, 심장이 아릿하게 저려오더군요.

할머니- 는 이 세상에서 저라는 존재 자체를 아무런 조건 없이 사랑해 주고 가여이 여겨 준 두 사람 중 한 명이었습니다.
나에게 가족이라는 존재가 있다면, 아마 할머니가 지금은 전부이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하고 있었죠.


저는 어렸을 때부터 혼자서 자랐습니다. 혼자서 자랐다는 의미는 고아라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남들이 당연하게 받아야 할 가족의 따스함과 정을 나누지 못한 채 자랐습니다.

3살 터울의 형은 저와는 완전히 다른 인간이었습니다. 키도 크고, 훤칠하고 샤프한, 어렸을 적부터 운동 만능에 공부도 잘 하는 그야말로 엘리트였죠. 자신을 쏙 빼닮은, 친탁을 한 장남을 아버지는 너무나 사랑했습니다. 어렸을 때 아버지의 사업이 번창해서 남부러울 것 없이 자란 집안에서, 형은 집의 모든 좋은 것을 독차지하면서 엘리트로 자랐습니다.

나중에 안 사실입니다만, 엄마가 저를 가졌을 때, 아버지는 크게 기뻐하면서 형과는 달리 우직하고 단단한, 남자다운 차남으로 자라 주기를 기대하셨다고 합니다. 하지만 그 기대와는 달리 외탁을 한 저는, 키도 자라지 않았고 형과는 달리 외모도 별품이 없었습니다. 우직하지 않고 밝고 쾌활한 성격이, 아버지가 그토록 싫어하는 외삼촌을 쏙 빼닮았다면서 아버지는 저를 무척이나 싫어했습니다. 술을 좋아하시는 아버지는 술에 취해서 늦게 들어올 때 마다 저를 가리키면서 ‘너는 어쩜 그렇게 네 외삼촌을 빼 닮았느냐’라면서 혀를 차셨죠. 그래서 어렸을 적 아버지의 맘에 들기 위해 부단히도 노력했었던 기억이 납니다. 물론, 아무런 대가도 없었지요. 방학 때 출근을 하시는 아버지의 구두를 열심히 닦았는데, 아버지가 그걸 보고는 쓸데없는 짓 한다며 구두만 다 버렸다면서 제가 닦은 구두를 쓰레기통에 버렸던 때가 생각이 나네요.

그래서, 엄마는 저를 그렇게 불쌍하게 여겨 줬습니다. 아버지와는 달리 내성적이었던 엄마는 그것을 뒤에서 지켜보고 저를 꼭 안아 주곤 했었습니다. 그리고 ‘엄마가 우리 둘째아들을 세상에서 제일 사랑해, 그러니까 슬퍼하면 안 돼’라고 말해주곤 했었죠. 그렇게 이야기를 하고 엄마가 우는 것이 싫어서 저는 도리어 씩 웃으며 괜찮다고 했었습니다. 아버지가 형의 생일 때 엄청나게 큰 장난감을 사고 오시는 걸 보고 그렇게 부러운 눈빛으로 봤었나봅니다. 저는 그런 거 받아 본 적이 없었거든요.


네, 아무런 조건 없이, 볼품없었던 저를 무조건 사랑해 줬었던 한 사람은, 저희 친모였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집안의 가세가 기울기 시작하면서 모든 것이 어그러지기 시작했습니다. 아버지의 사업은 도산하고 아버지는 빚쟁이들에게 쫓겨 중국으로 도망가고, 엄마는 우리 형제를 데리고 어떻게든 살기 위해 일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하지만 몸도 약하고 내성적이었던 엄마는 그 때부터 건강이 악화되기 시작했죠.

저는...그 때부터 지옥에서 살기 시작했습니다. 엘리트로 자라던 형이 갑자기 달라진 생활을 견디지 못하고 그 스트레스를 저에게 풀기 시작한 것이죠. 야간자율학습이 끝나고 형이 집으로 돌아오는 그 시간은 저에게는 마치 ‘죽음의 카운트다운’처럼 무서웠습니다. 무슨 트집이라도 잡아서 때렸으니까요. 아무 이유 없이 아무것도 입지 못하고 맞는 생활이, 4년 동안 계속되었습니다.

하지만 그 사실을 알고도 엄마는 누구의 편을 들지 않고 ‘싸웠다’라는 이유로 우리 둘을 모두 혼냈습니다. 당연히 아무런 이유 없이 맞기만 했던 저는 억울했습니다. 싸운 게 아닌데, 난 맞기만 했는데. 라면서.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그 때 제 편을 들어주고 형을 혼내면, 그 극도로 예민한 형이 삐뚤어질까봐 어쩔 수 없이 둘을 같이 혼낼 수밖에 없다고 하더군요. 한 번은 아령으로 머리를 맞은 적이 있었습니다(그래서 제 좌측 머리 한쪽에 땜빵이 있죠, ㅎ..). 정신을 잃고 쓰러져서 병원에서 깨어났는데, 집에 돌아와서 똑같이 혼나고 억울해 했던 기억이 나네요.

그렇게 중학교에 가고 난 뒤...엄마의 몸은 급속도로 약해져, 결국 쓰러지고 말았습니다. 어쩔 수 없이 저희 형제는 길동에 있는 할머니의 집으로 이사를 할 수밖에 없었죠. 아픈 몸으로 저희를 배웅하며 손을 흔드는 엄마의 모습이, 저에겐 마지막이었습니다. ‘며칠 후에 엄마도 갈거야’라고 말한 걸 아무렇지도 않게 믿었던 철없었던 제가 그렇게 원망스러웠습니다.

엄마는 며칠 후에 따라오지 못하고, 2주 뒤에 위암으로 돌아가셨습니다.

그리고 우리 형제는 할머니의 손에 맡겨졌습니다. 가세가 기운 집안은 풍비박산이나 있었고, 아버지의 형제들의 자식들, 즉 사촌형제들도 모두 할머니의 집으로 오게 되었죠. 할머니도, 조금만 스트레스를 받으면 저를 때리는 형을 보면서 저를 무던히도 감싸 주었습니다. 다른 손자들에게도 마찬가지였겠지만..세상에 태어나서 나를 아무런 이유 없이 사랑을 쏟아 주는 존재를 만나 본 적이 없었던 저에게는, 할머니는 참으로 각별한 존재임에 틀림이 없었습니다.

나중에 군대를 다녀오고 난 뒤에 할머니에게 “할머니는 왜 그렇게 나를 이뻐했어?”라고 묻자, 할머니는 “너 뿐만 아니라 다들 똑같았어, 이 쓸개 빠진 놈아!”라면서 껄껄 웃으셨지만, 제가 자고 있을 때 남 몰래 슬퍼하면서 그 거친 손으로 저를 쓰다듬던 할머니의 손을 저는 아직도 잇지 못합니다.


저는 그렇게 자랐습니다. 그리고 자라면서 오직 한 생각만 했습니다.

“어른이 되자. 그리고 혼자 살자. 내 상처와 나라는 인간을 내 마음 속 심연 어두운 곳으로 가둬 두자. 그리고 모두가 좋아해주는 사람이 되자. 그러면 슬퍼하고 상처받을 일은 이제 없겠지-”라고.

고등학교를 다니던 시절에, 아버지는 중국에서 돌아오셔서 엄청난 집안의 지금의 새 어머니를 만나 재혼을 하시고 재기하셨지만, 저는 그 비호를 받지 않고 나와서 살기 시작했습니다. 제가 대학에 들어갔을 때(아버지와 같은 대학입니다), 아버지는 저에게 전화하셔서 “니가 태어난 이후로 애비에게 처음으로 기쁨을 주는구나”라고 하시더군요. 이 때부터 ‘가족은 없다’라는 생각을 굳히게 되었습니다.

저는 지금 혼자입니다. 그리고 앞으로도 혼자일 겁니다. 너무나 먼 길을 걸어와서, 홀로 우두커니 그 사람들을 보고 있는 것 같아요. 그리고 저라는 인간을 아무런 조건 없이 사랑해 줬던 마지막 한 명-아마, 이제는 없겠지요-의 작아진 모습을 보고 나니, 아스라한 옛날의 일들이 떠오르는군요.

그래도 이제 난 어른이니까, 혼자라도 어른이니까 힘내서 살아가야겠죠. 제게 허락된 시간이 얼마나 있는지는 모르지만..그래도 힘내야겠지요.

갑자기 이상한 장문을 써서 죄송합니다. 그래도, 한 번은 내가 많다면 많은, 짧다면 짧은 시간을 함께 보냈던 불펜 분들에게 한번 이야기해보고 싶었어요. 차분이 끝까지 읽어 주신 여러분께 감사의 말씀을 드립니다.


"함께 하면 행복한 사람들, 그리고 그 사람들과의 시간을, 소중히 여겨주세요. 그 시간은, 그 자체만으로 당신에게 선물이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