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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에서 연상할수있는 것처럼 이 책은 훈민정음, 즉 한글탄생의 배경과 과정을 다룬 책입니다.
그런데 저자를 살펴보면 내국인이 아니라 일본사람입니다. 노마 히데키라는 분이죠
만약 한국사람이 저런 종류의 책을 썼다면 한글의 우수성을 일방적으로 과시하기위한 민족주의적 정서를 바탕에 깐 책이라
생각되기 쉽고 또 실제로도 그런 경우가 많다고 할수있었죠.

그러나 이 책은 저자가 외국인입니다. 그것도 일제강점기 시절 한국어와 한글을 그토록 탄압했던 일본인이죠.
그런 그가 보는 한글은 과연 어떤 글자일까요?

일단 제목과 저자에서 풍겨나오는 이 어울리지않는 조합에 묘한 매력을 느껴서 책을 주문했습니다.
지금 절반쯤 봤습니다만 결론적으로 말해서 매우 훌륭한 책일뿐만아니라 한국의 교양인이라면 누구나 한번쯤은 일독해야될 책이라고 감히 말할 수있는 저작이더군요.

제가 평소에 국어나 한글관련 서적을 잘 찾아 읽어보는 편은 아니라 이런 종류의 책, 즉 한글의 창제과정을 본격적으로 다룬 책이 많이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이 책처럼 한글이 만들어진 배경과 역사를 객관적인 시각에서 다룬 책이 기존에 있는지 생각나는게 없더군요. 
그동안 우리는 맨날 말로만 한글의 우수성과 과학성을 떠들어 댔지만 정작 한글이 왜 우수한 문자인지를 다룬 (학술서를 제외한) 교양서적은
사실상 전무한 상태라고 할수있는데 바로 그런 종류의 책이 일본인에 의해서 나왔다고 하는 것은 좀 부끄러운 일이라 아니할수없겠네요. 

이 책은 2010년 일본에서 출간되고나서 일본대형서점에서 신서시리즈중 전체 4위에 랭크될 정도로 베스트셀러가 되었다고 합니다.  출간 즉시
일본의 지식인들에게도 이 책의 가치가 높이 평가될 정도로 훌륭한 책이라는 이야긴데 실제로 제가 읽어보니 충분히 그러한 평가에 고개를 끄덕이게 만들더군요. 

제가보기에 무엇보다도 이 책의 장점은 한국인이라면 밝히기 어려웠을 타언어 혹은 타문자사용권자의 시각에서본 한글제자원리의 탁월함입니다. 
특히 같은 한자문화권에 살면서 한자라는 문자를 지知의 기초로 삼으면서도 중국어와는 다른 자신들의 언어를 이에 투영하지 않을 수없는 환경을 공유했던 한국과 일본의 경우를 살펴보면서 이렇게 서로 이질적인 층들을 어떻게 하나로 결합시켜나갔는가 하는 과정을 매우 탁월하게 서술하고 있습니다. 특히 초반부에 나오는 한문훈독관련 부분은 매우 흥미롭더군요. 일본은 일본어를 하시는분들은 잘 아시겠지만 한자나 한문을 독해할때 발음 그대로 읽는게 아니라 그 뜻으로 읽는 관행이 있는데 이를 한문훈독이라고 합니다. 예를들어 山을 일본에서는 san이라고 읽기도 하지만 やまyama 라는 화어로 대응하여 읽기도 하는데 이를 소리나는대로 읽는 '음독'에 대비하여 '훈독'이라고 부르죠. 일본에서는 이런 훈독법을 단지 한자로된 단어를 읽는데에만 사용하는 것이 아니라 한문 다시말해 텍스트를 읽을때도 사용하는데 이를 '한문훈독'이라고 말합니다. 

일본은 현재 다른 한자사용권나라에서는 사용하지 않는 이런 한문훈독법이 고도로 발달하였는데 일본의 지식인은 이런 훈독법의 발전을 자국문화의 탁월한 성취로 봅니다. 한자음을 그대로 음독하는 것보다 훈독하는 것이 한자문화를 보다 자신의 것으로 내면화하고 체화했다는 증거로서 인식했다는 것이죠. 가라타니 고진도 이와 비슷한 견해를 보였던 것으로 압니다. 

그런데 이런 훈독법이 지금은 한자음 그대로 읽는 음독 혹은 순독구결만 하기에 일본같은 훈독은 없었던 것으로 생각하기 쉽지만 조선조 이전시기(정확히 훈민정음 창제 이전시기)에는 지금의 일본과 같은 훈독법이 한반도에도 존재했었다는 것입니다. 이런 훈독이 있었던 이유는 한문을 읽을때 중국어와는 다른 언어를 가지기 때문에 한문원문에 토를 달 필요가 있었는데 이 토를 달때 훈독법이 사용되었다는 것입니다.

예를들어 "學而時習之면 不亦說乎아" 에서 "면"이나 "아"가 바로 토입니다. 그런데 한글창제 이전에는 이 토 혹은 구결도 한자로 사용해야만 했는데 한글이 없는 관계로 한자로 구결을 쓸 때 훈독법이 사용되었다는 것입니다. 저자는 이런 훈독법을 일본과 한국사이를 오가면서 상세히 비교해 갑니다. 저자가 한글창제 이전에 한반도에서의 구결이나 훈독법을 이야기한 이유는 바로 한글이 이러한 구결표기에 있어서의 문제점을 단번에 해결해줄수있었기 때문입니다. 조선에서 훈독법이 사라진 이유도 한글의 창제로 인한 훈독법의 불필요성 때문이라고 할수있겠지요. 

훈독법관련해서 정리해보면 이렇게 됩니다. 일본에서는 한글과 같은 문자가 없었던 관계로 훈독법이 대신 고도로 발전하였고 조선에서는 한글이 창제되면서 구결사용에 있어서 번거로운 훈독법을 사용할 필요성이 사라지게 되었던 것이죠. 이런 관점에서보면 일본에서의 한문훈독전통도 그들의 문화의 소중한 유산이라 할수있지만 한국에서의 훈독법의 소멸 역시 한글의 탄생에 의한 것이므로 知의 역사에서의 진일보로 볼수있게 되는 것이죠.

그밖에도 예전에는 미처몰랐던 사실들, 예를들어 당시 동아시아에 전해졌던 모든 종류의 알파벳은 모음은 사실상 없었고 자음만으로 표기된 알파벳이었으나 한글은 이 부재했던 모음체계를 발견하고 정교화시켜 한글을 완성했다고 하는 점, 현대 음운학적으로 보았을때도 완벽한 음소단위의 발견 그리고 더욱 놀라운 발성기관을 본뜬 게슈탈트로서의 자음자모 이야기 등 오늘날 우리는 너무나 손쉽고 당연하게 사용해서 미처 깨닫지 못하는 한글의 탁월함에 다시한번 감탄하지 않을수 없게 만드는 이야기들로 채워져 있더군요. 

이 책은 단지 한국어 전공자로서 한글의 우수성만을 다룬 책이 아닙니다. 그보다는 오히려  한자문화권속에 살면서 이를 자신의 언어로 변형시켜 사용해왔던 문화와 그 에크리튀르의 이야기를 보편적인 시각에서 바라다본 책입니다. 이를 통해 우리는 동아시아에서 문자와 지식이 어떻게 자신들의 언어로 변형되어왔고 또 그러기 위해서 어떠한 노력하여 왔는지 알수있게 됩니다. 그런데 이러한 노력의 정점에 '한글'이라는 문자의 탄생이 있었다고 저자는 보고있는 것이지요. 

앞서도 언급했습니다만 한국의 지식인이라면 꼭한번쯤은 일독할 가치가 있는 책입니다. 한글을 쓰지 않는 일본지식인들도 인정하는 책인만큼 한글사용자로서 보는 이 책의 가치는 더욱 소중하게 다가온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