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ASEBALLPARK

요근래 심심찮게 웹에 올라오는 글중 하나가 바로..

'앞으로 절대 강간당하려는 여성을 구해주지 않겠다' 라는 글인데요..


대충 다들 한번쯤은 보셨을만한 글들인데
내용인즉슨 성폭력의 위험에 처한 여성을 가해남성과의 사투끝에 간신히 구해 주었더니 그 여성은 고맙다는 말은 커녕 사실관계 확인도 해주지 않아 오히려 폭행 가해자의 처지가 되어 어떠 어떠한 불이익을 당했다..라는 요지의 글입니다.

뭐.. 요근래 들어 저런 글들이 꽤 자주 올라오고 또 일부 남초 사이트에서는 일부 여성의 개념없음을 까기위해 실제 일어났는지도 의심스러운 글을 경험담 삼아 올리기도 하는데 사실 제 경우는 몇해전 잊고싶은 기억이 떠올라 씁쓸해 집니다.



제가 대학 2학년 시절이던 97년..

어지간한 친구들은 모두 1학년을 마치고 휴학하고 입대를 했던 상황이었고
원래 술먹고 놀기 좋아하는 저로서는 계속 학교다니면서 당시 CC였던 여친과 연애하고 있던 상황이었죠.


제가 순수미술을 전공했는데 당시 우리과에는 부산의 모 대학교에서 국어 국문학을 전공하고 본인의 오래된 꿈때문에 다시 우리학교로 들어온 누나가 한명 있었어요.
대부분 많아봐야 재수 삼수 사수정도였던 우리 동기들에 비해 나이가 꽤 많았었는데..(저랑 6살차이)
원래 부산태생이던 누나는 우리학교 타 과에도 소문이 날만큼 예뻐서 여신이라 불렸었어요.

외모만 예쁜것이 아니라 성격도 털털하고 술도 잘마시고 나이차가 있지만 우리들이랑 잘 어울려 놀고 무척 친하게 지냈었죠.(부산사투리는 덤)
또 학교 근처에서 혼자 자취를 하고 있었는데 그 지역 야학에 나가서 야학 학생들에게 본인이 전공했던 국어를 무료봉사로 가르치던 천사같은 누나였습니다.


그런데 97년 후반기에 금융위기가 오고 많은 회사들이 줄도산을 했는데, 당시 저희 아버지가 운영하시던 조그마한 사업체도 부도가 나서 저희집도 급격하게 어려워졌었습니다. 학비며 생활비문제때문에 제 나이또래 남학생들은 모두들 군입대를 희망하게 되었고 유례없는 입대경쟁을 하게 되죠.

당시 제 여친의 아버지가 직업 군인이었는데 여친의 권유로 저는 삼사관학교라는곳에 지원했었습니다. 원래 삼사관학교라는곳이 학군단과는 달리 대학교2학년을 수료하고 시험을 봐서 합격하면 나머지 3,4학년을 육사처럼 삼사안에서 기숙생활을 하면서 학업을 마치고 소위임관하면 일정기간 군대에서 의무복무를 하는 곳이죠. 제가 알기로 그 전까지는 그곳 경쟁율이 거의 1대1정도여서 지원만 하면 합격되는 곳으로 알고 있었는데.. 제가 지원했을때는 그곳도 역대 최고 경쟁율을 기록했던걸로 알고 있어요. 6백명인가 뽑는데 3만명 정도가 지원했던것으로 기억하니...

여튼간에 저는 우리과에서 저와 당시 군대에 가지 않았던 친구놈 둘이서 삼사에 지원을 했고,
다행히 1차 서류는 통과가 되고 삼사관학교 교장에서 2차 면접과 체력측정을 받고 난 직후였죠,.,.

어느날 위의 그 누나가 이제 시험 통과하면 못보게 될테니 술을 한잔 사겠다고 해서 그 친구놈과 저는 학교 근처에서 그 누나와 셋이 술을 마시게 되었죠. 1차에서 얼큰히 술을 마시고 2차에서도 어지간히 마셨는데.. 거기서 그냥 끝냈어야 했는데 혈기왕성했던 우리들은 3차로 그 누나의 자취방에서 술을 한잔 더 하기로 하고 술을 싸들고 그 누나 방으로 갔죠.

방은 원룸이었는데 저는 침대옆에 앉아서 술을 마시다가 술이 올라와서 저도 모르는 사이에 침대에 기대서 졸고 있더라구요.

시간이 얼마 지나지 않아...

이상한 소리에 눈을 떴는데....


침대위에 그 친구놈은 그 누나를 힘으로 덮치고 눌러서 옷을 벗기려 하고 있었고, 그 누나는 힘겹게 하지말라고 반항을 하면서 계속해서 제 이름을 부르며 울면서 살려달라고....

순간 제 눈에서 불이 튀면서 저는 다짜고짜 그놈을 헤드락걸고 일단 밖으로 끌고 나와서 주먹으로 얼굴을 한대 친것까지는 기억이 나는데 지금도 좀 이해가 안가는게 그상황에서 필름이 끊긴겁니다;;
이후에 정신을 차려보니 경찰차가 출동했고 제가 그 경찰차에 타지 않으려고 경찰들과 옥신각신 하고 있는 와중이었네요.
나중에 알고보니 새벽에 싸우는 소리에 동네에서 민원이 들어갔고, 경찰이 도착했을때는 길에서 제가 그놈 배위에 올라타서 디지게 패고 있더란...;;


파출소에 도착해서 앉아있는데 그때서야 그놈 얼굴을 보니 얼굴이 이거 뭐.......;;
저는 그때 술의 무서움을 알았는데.. 진심으로 술을 먹고 나도 모르게 사람을 죽일수도 있겠구나 라는 생각이 들더군요.

여튼간에 그놈은 집이 학교 근처였기때문에 그놈 아버님이 곧바로 도착하셨는데..


저는 경찰분께 정황을 가감없이 설명하고 있었죠. 처음에는 저를 뭐 깡패새끼쯤으로 보던 경찰도 그놈에게 '야 니가 잘못했네'이러고...
솔직히 저는 저만 가해자 취급 받는게 억울했고(당시까지 흥분을 가라앉히지 못하고 있던 저만 수갑을 차고 있었고) 진술을 마치고 흥분을 조금 가라앉히니 수갑을 풀어주고 담배한대가 무척이나 피고 싶어서 경찰분께 담배 한대만 나가서 피우고 오겠다고 했습니다.
경찰은 담배한대 건내주며 나가서 피우지 말고 여기 앉아서 피우라고 하더군요. 저는 그래도 친구 아버님이 바로 옆에 계시는데 어떻게 그러느냐 안도망 갈테니 파출소 앞에서 담배한대만 피우마 하고 담배를 피우고 다시 들어가서 앉았는데 헐......

그당시에 저도 씨씨였고 그놈도 여친이 있던 상태에서 그 여친이 종종 우리술자리에서 함께 술마신적도 있었고, 그 여친이 한동네여서 그놈 집에도 자주 놀러가서 그놈 부모님도 서로 사귀는걸 다 알고 있는 상태였는데..

제 옆에 앉은 그놈에게 그놈 아버님이 '너랑 그 누나랑 서로 좋아서 그랬는데 시샤모 저놈이 질투나서 너와 싸운거라고 그렇게 말해라' 라고 얘기하고 있는겁니다.. 뭐 조용조용하게 말하는데 그게 내 귀에 들리니 이건 뭐 진짜 집안이 막장도 아니고....
제가 그소리를 듣고 하도 어이가 없어서 '00이도 사귀는 사람이 있고, 저도 같은과에 여자친구가 있는거 우리과 모든 사람이 다 아는 사실인데 그렇게 말씀하시면 안되는것 아닙니까?' 라고 따졌더니 모르는척 묵묵부답....

시간이 좀 지나고 그 누나는 조금 추스리다가 파출소에 왔는데 제말이 사실인지 경찰이 물었을때 굉장히 소극적으로 대답한것 같더군요.
어찌됐건 어린나이에 타지에 혼자 올라와서 유학하는 상황에 일이 커지는게 부담스러웠을것이라고 지금은 이해하고 있는데.. 사실 굉장히 섭섭하더군요. 그 누나 딴에는 걔랑 나랑 둘이 싸운건 싸운거고, 어찌됐건 그놈도 저도 본인과 같은과 동기이므로 좋게 잘 마무리 되는게 최선이라고 생각했던것 같기도 하고....

단순히 술먹고 싸운 사건이야 서로 합의만 좋게 보면 파출소에서 정리가 되고 별 탈 없는것으로 알고 있는데, 그놈 아버지는 그게 아니었나 봅니다.
파출소 있는와중에 아들 데리고 나가서 근처 병원가서 전치3주 진단서 끊어오고 아직 우리 부모님이 도착하지도 않은 상황에서 결국 경찰서까지 넘어갔네요.
아침이 되어서 부모님이 부랴부랴 오셨고, 치료비와 약간의 위로금 정도를 생각하셨는데 그쪽에서 진단서를 근거로 과한 합의금을 요구하더랍니다.
제가 이러이러 해서 일이 이렇게까지 되었다라고 제 아버님께 말씀드리자 저희 아버님도 열이 받으셔서 저를 데리고 병원에 가셨네요.
그때 저는 그닥 상해가 없었는데 오른손 새끼 손가락에 금이가서 조금 부어있는 상태였거든요. 똑같이 전치 3주 진단서 발급받고...

그쪽에서는 얼마 금액 이하로는 합의해줄수 없다고 하니까 우리쪽도 그래 그럼 니들 맘대로 해라..

결국 결과는 쌍방폭행 기소중지 처리가 되서 똑같이 벌금 100만원씩 나왔던걸로 기억해요.
지금 생각해보면 참 어이가 없죠..

당시까지는 어린마음에 그래도 좀 '정의는 승리한다?' 요런 생각도 있었는데.. 가뜩이나 어려워진 집안 사정에 나가서 사고나 친걸로 되버리니까...
그 누나도 디게 야속하고...



이후...

저는 삼사에 떨어졌습니다. 뭐.. 지금 생각해보면 다행스러운 일이지만...
그놈은 붙어서 삼사에 갔구요..ㅎㅎ

제가 벌금 100만원 나온건 엄니께 무슨일이 있더라도 꼭 갚겠노라고 했고..
나중에 미친듯이 알바해서 엄니께 세배로 갚았네요.



이게 이 일로 끝났으면 뭐 그러려니 하는데....ㅎㅎㅎㅎ

인생이 참 묘하고 운명이란게 정말 있긴 있는건가요?



저는 결국 3학년을 마치고 1년을 놀다가 99년 11월달에 친구놈들 제대하는것 다 지켜보고 늦으막히 입대를 했는데..

군대가서 맡은 보직이 2/4종 군수 행정병이었거든요.
일병 갇 달았을때.. 아마 00년 6~7월경이었을껀데..
상급부대 여단에서 초임 소대장 발령 공문이 내려왔는데..
그녀석이 그 명단에 있는겁니다.
같은 여단내 옆부대 소대장으로..ㅎㅎ

제가 그 공문 내려오고 행정반 간부들과 선후임들에게 얘 내 친구라고 그놈과의 악연을 다 말해줬거든요.
그놈 우리 중대 중대장에게 인사하러 왔을때 중대장실에 커피를 제가 직접 갔다 줬는데 그때 절보고 소스라치게 놀라던 그놈 얼굴이 잊혀지지가 않네요..ㅎㅎ

제 보직 특성상 여단 예하 부대를 많이 돌아다니고 간부들과 함께 업무처리할 경우가 많았는데
그놈 얼굴도 자주 봤고 또 볼때마다 제 앞에서는 뭔가 약점잡힌 강아지마냥 설설 기던게 생각나네요.




이로서 오늘도 장문의 뻘글 하나 적립완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