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ASEBALLPARK

로마의 산탄젤로다리를 본따만든, 양쪽에 한줄씩 늘어서 있는 각양 각색의 성상들덕에
까를교는 유럽에서도 가장 아름다운 다리로 손 꼽힌다.




30개나 되는 성상들이 각각 어떤 사연을 가진 누구인지를 모두 설명해 주는 책자는 없었지만,
백배가 설명하는 몇몇들 중에서도 마음에 꼭 드는 것은 하나 찾을 수 있었다.








롱기누스의 창에 찔린 예수의 상처에 입을 맞추기 위해 어느 수녀가 십자가를 기어오르자,
예수, 다 죽어가는 마당에도 허리를 굽혀 여인을 맞다.
이런걸 보면 감동을 하지 않을 수가 없다.
여기가 바로 지저스 크라이스트 슈퍼스타의 본거지인 유럽이 아니던가.


일정이 더 길어져서 감동 받을 일이 조금만 더 생겼더라면,
남은 인생을 예수님께 몸 바쳐 봉사하면서 한국 개신교의 개혁을 목놓아 부르짖게 되었을지도 모를 일이다.
어쩌면, 어리석은 이들이여 회개하라면서 빨간 조끼에 확성기 들고 지하철역에서 고함지르고 다니게 되었을지도 장담할 수 없다.








여하튼 배낭족에게 성수기의 까를교는, 멀미 나기에 딱 알맞은 곳이다.
일단, 만만해진 물가 덕에 배터지게 퍼먹은데다가,
혼절할 때까지 담배를 사다 피우니 속이 제정신이 아닌 상태인 경우가 많다.
이탈리아나 스페인에 비할바는 되지 못하지만 태양은 충분히 뜨겁다.
온 동네 배낭족이 다 모인듯한 다리 위는 발 디딜곳이 아쉽고,
성상들 앞에서 자리를 차지 한 예술가들의 악기 연주소리, 노랫소리, 박수소리가 어지럽다.
흡사 여섯살 때 문경에서 5일장이 선 날, 읍내로 따라 갔다가 할머니 손을 놓쳤을 때의 기분이다.




그리고, 외롭다.
사람이 이렇게 많은데 이 중에서 어느 누구 나랑 같이 이야기 나눌 사람 한 명 없다는 사실이 아이러니하다.
어디 한번 물 보다 싸다는 체코 맥주도 마셔 보고 싶은데,
식사는 혼자서도 얼마든지 할 수 있지만 레스토랑에서 술을 혼자 먹을 자신은 없다.
가만히 실눈을 뜨고 지나가는 사람들을 한명 한명 노려보지만,
말 걸기 만만해 보이는 친구는 눈에 띄지 않는다.




혼자 다니다 보니 생각할 시간이 많아지고 그러면서 나름대로의 개똥철학도 생겨가는 것은 좋지만,
사무치는 외로움은 감당하기가 참 쉽지 않다.
중학교 때 부터인가, 할아버지는 날 앉혀놓고 사람은 혼자 살지 못하는 거라고 늘상 말씀하시곤 하셨다.
난 그 말이 내가 장손이고 하니 돌아가시기 전에 증손자도 보고 싶으시겠다
빨리 각시를 데려오라는 압력인줄로만 알고 대답만 예예 하고 한쪽 귀로 흘렸지 정말 이런 의미인줄은 몰랐다.








30개의 성상들 중에서 가장 많은 사람이 몰리는 것이 이 네포무츠키 성인의 동상이다.
유럽 각지에는 이렇게 ‘만지면 소원 들어주는 시리즈물’이 골고루 퍼져 있다.
처음에야 위대한 선현을 기리고 신앙을 깊게 한다는 순수한 의도였겠지만,
언젠가부터 여기다 손을 대고 기도를 하면 성인이 은혜를 내린다고 믿게 되었을거고,
이윽고 성직자들이 대대적으로 축복에 대해 선전하게 되었을 터이다.
영험하다는 소문이 나기 시작하면 새전도 두둑하게 들어왔을 테니까.



원래 그리스도교라는 종교 자체가 우상숭배를 금지하고는 있지만
자고로 사람이라면 이왕지사 절을 할거, 기왕이면 형태 있는 것에다 기도 하고 빌어야
뭔가 했다는 만족을 얻기 마련이다.
성직자들 입장에서도 뭔가 눈에 보이는 것을 보여주는 쪽이 손쉬운 포교 방법이었을거다.
셀 수 없이 많은 사람들이 소원을 빌면서 손이 탄 곳은 반질반질 윤이 난다.




이런 곳에서는 우주정복 같은 원대한 포부를 빌면 안 된다.
고작 간통한 왕비가 털어 놓은 고해성사의 비밀을 지키려다 죽은 신부따위가
우주를 정복할 수 있게 해줄리 만무하다.

그런 소원은 어디 독일 시골마을의 인적 뜸한 예배당 지하에서
촛불에 동그라미 속의 별을 그려놓고 루시퍼쯤 되는 악마를 불러내다가 영혼을 팔면서 빌어야 한다.
설령 네포무츠키 성인이 소원을 다 들어준다고 해도
이거 만진 사람들이 다 우주정복 하겠다고 나서면 그 역시 곤란한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러니까 이런데서는, 어느 정도 실현이 가능할 만한 소박한 소망을 이야기해야 한다.







성상에서 돌아서자마자 뒤통수에서 “저기요...”라는 익숙한 나라말이 들려온다.
은쟁반에 옥구슬이 구르는듯한 목소리의 주인공이 부탁한대로 사진을 찍어주고 나서는,
지금부터 프라하 성으로 갈 생각인데 함께 가지 않겠냐고
‘최대한 비굴하지 않게’ 요청했고, 흔쾌히 승낙 받았다.
흠. 신부님도 성미가 어지간히도 급하신가 보다.
내가 빈 소원은 채 1분이 되지 않아서 이루어졌도다. 할렐루야.




동행이 생겼다.
그러고 보니 원래 혼자서도 잘 노는 성격이긴 하지만 그 동안 어찌나 외곬이었는지,
여행을 시작한지 20일이 다되어가는 마당에 또래의 한국 배낭족과 단 둘이 다니는 것은 처음이다.



다들 출발 전에는 유럽 그 먼데까지 어떻게 혼자 가냐며 앓는 소리를 하지만,
함께 갈 친구가 마땅치 않아 혼자 훌러덩 와 버린 배낭족이 알고 보면 더 많다.
다들 현지에서 여차저차 하다가 죽이 맞아 함께 다니게 되는 것이 이치인데,
여태 죽어라 혼자서만 다녀온 내게는 분명히 뭔가 문제가 있다.







어쨌거나 기분이 좋다.
까를교를 건너, 프라하성까지의 악명 높은 언덕을 오르는데도
가슴이 설레어 다리 아픈줄도 모르는 나는 한 마리의 아둔한 짐승이다.
프라하성 내부의 성 비트 성당에는 네포무츠키 성인의 유해가 안장되어 있다는데,
우리나라 절간처럼 불전함 비슷한 것이 있다면 10코른쯤 기꺼이 헌금 할 용의가 있다.










현직 체코 대통령의 집무실이 있어서인지, 프라하성의 근위병들은 다른곳의 근위병들보다는 군기가 퍽 잘 잡힌 모습이다. 더운 날씨에 돈은 많이 받을는지 모르겠다.




“그런데 나보다 어려보이는데.. 몇 년생이야?”하고 넌지시 말 낮춰 봤다가
“어머나 오빠네. 죄송해요.”라고 화들짝 사과하는 이 아가씨,
사실 첫인상부터 뭔가 예사롭지는 않았다.
아침부터 온종일 걸어다니자니 그렇지 않아도 다리가 아픈데,
성비트 성당 첨탑의 300개 가까운 층계를 굳이 걸어 올라가야 하냐고 징징대자
‘남자가 뭐 이러냐’하는 표정을 잠시 짓더니, “올라 가보면 예쁠거예요.”라는 말만 남기고
씩씩하게 혼자 계단을 오르기 시작했고, 나는 뭐 저런 튼튼한 애가 다 있냐며 울상을 짓는다.
덕분에 네포무츠키 성인의 재단에 뭔가를 바치는 곳은 찾지 못했다.










“거 봐요. 올라 오니까 예쁘댔잖아요.”
틀린 말은 아니다. 여행이 다 끝나고 집에서 사진들을 정리하면서 보니
높은 곳에 올라가서 찍은 사진 치고 버릴 사진이 없었다.
체력을 아낀답시고 종루나 탑이 나올 때 마다 기를 쓰고 올라가지는 않은 것이 살짝 후회가 되기도 한다.
높은 곳에서는 멀리 볼 수 있지만, 낮은 곳에서 아껴 둔 체력으로 더 가까이 자세히 다가가서 볼 수 있었다고 좋게 좋게 생각하고 있다. 에펠탑에 못 올라간게 후회가 된다고 해서 이제와 뭔가 어떻게 할 도리는 없다. 그러니까 생각은 긍정적으로, 항상 밝게 가져야 한다.



















술자리는 그럭저럭 즐기는 편이지만, 내 주량은 형편 없다.
소주 딱 반병만 있다면 술 취한 사람이 할 수 있는 실수는 종류별로 한가지씩 모두 다 보여 줄 자신이 있다.
내게 술이란, 소주든 맥주든 막걸리든 무조건 맛은 씁고 넘기면 머리 아픈,
먹은 다음에야 기분이 좋아지는 맛 없는 음료다.







하지만 이건, 우리 돈으로 한잔에 천원도 하지 않는 체코 맥주는,
맛은 약간 쌉싸름 하면서도 한번 넘길 때 마다 목구멍을 깊은 곳을 기분 좋게 쓱쓱 간질러 준다.
이른바 ‘목넘김’이 좋다. 맛깔스럽다.
첫 한두모금만 홀짝거릴 생각으로 잔을 들었다가, 나도 모르게 꿀떡꿀떡 대여섯모금을 한꺼번에 삼켜버리게 된다.
컵이 말을 하는 것 같다.
“자! 마셔마셔! 시원하지 시원하지? 계속 넘기라구! 맥주는 원래 벌컥 벌컥 들이키는거야.
내가 바로 체코 맥주야!!”



주량이 원망스러워지는 순간이다.
빨래방이 문닫기 전에 세탁물을 찾을 필요만 없었다면,
에라 모르겠다하며 코가 삐뚤어지도록, 그러니까 2000cc정도는 마셔 버렸을텐데.





어처구니 없이 선진화 되어있는 빨래방 요금에 기막혀하고,
호스텔에서 지단의 박치기로 마무리 된 월드컵 결승전을 보고 다시 나오니 드디어 밤이 된다.
초점을 못 잡는 카메라를 애써 달래가면서 까를교 건너편에서 바라보이는 프라하성의 야경을 찍고 나자 기분이 묘하게 우울하다.












고작 남들 다 찍는 이런 사진을 찍으려고 여기까지 온 것은 아닌데.
이런 여행에 무슨 의미가 있는걸까. 내가 왜 이렇게 고생스럽게 여행을 하고 있는 걸까.
과연 이놈의 카메라는 내일이면 고칠 수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