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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현오빠?"





















그래, 베네치아 시내 구경을 나섰다가, 전날 탄 야간열차의 피로를 못 이겨

산마르코 광장 한켠에 앉아 꾸벅꾸벅 졸고 있을 때였다.







"중현오빠?"





















그래, 내 이름은 중현 맞다.

여동생이 없는 나를 오빠라고 부르는건, 학교의 여자 후배들 뿐이다.

그리 내세울만한 외모가 아닌데다 말 주변도 없어서 별로 인기 있는 선배는 아니지만,

어쩌다 나는 보니 학교에서 주변에 두루두루 아는 사람은 꽤 된다.







"중현오빠?"



























그래, 민영이의 목소리다.

빨간 뿔테 안경을 즐겨 쓰던, 싹싹하고 귀염성 있는 그 후배다.

아주 친한 사이는 아니었지만, 수업도 몇번인가 함께 들었었고,

같은 학회에서 활동하면서 자주 부대낀 사이라 익숙하다.

그리고 보니 학교의 친구들을 본지도 꽤 되었다.

하지만 여기는 학교가 아니라 무려 베네치아다. 외국이다.

잠이 좀 덜 깬 상태이긴 하지만 꿈 같지는 않고, 환청이려니.

세상에나 이제 환청까지 다 들리다니, 어처구니가 없다.







"중현오빠?"





















하지만 내 앞에서 양 무릎에 손을 얹고 허리를 굽혀서

내 얼굴을 빤히 바라보는 저 아가씨는 내가 아는 그 민영이가 맞다.

꿈도 아니고 환청도 아니다. 지구 반대편에서 학교 후배를 만났다.



내가 뭐라고 대꾸할 말을 찾는 사이,

민영이는 혼자 박수 치고 팔짝팔짝 뛰며 반가워 한다.

자기는 남자친구와 함께 3주동안 호텔팩으로 온 거라고,

이제 로마로 가야 하지만 마지막으로 한바퀴 더 둘러보고 있는거라고,

자기 할 말만 좔좔 쏟아 놓고는 다음 학기에 보자며

멀찍이서 양손에 캐리어를 들고 기다리던 남자와 함께 사라져 버린다.





피우지도 않는 담배를 태워야 할 타이밍이다.

혀가 얼얼해질정도로 매운 음식이 먹고 싶어진다.

입에서는 또 다시 혼잣말이 나온다.

























"민박집을 가야 하나?"













이미 40여일간의 유럽 배낭경력이 있는 친구 한 녀석은,

여행중에 제발 한인민박 좀 가지 말라고 내게  노래 노래를 불렀었다.

더 싼 가격에, 월등히 나은 시설과 위치의 호스텔들이 지천으로 널려 있는데

뭐하러 유럽까지 가서 굳이 한인민박집을 찾느냐는 주장이었다.



친구의 조언을 기꺼이 받아들인 나는 모든 잠자리를 호스텔에서 마련하다가

결국 보름을 채우지 못하고 빠리에서 몽마르뜨로, 샹젤리제로 한국인을 찾아

엉금엉금 기어다녔던  화려한 이력을 만들고야 말았다.





















하지만 내 친구의 말은 절대 틀린 것이 아니다.







주로 한국인이나 조선족 교포들이 운영하는 이른바 '한인민박'은,

자국에서 정식으로 숙박허가를 받지 않고 일반 가정집에서 숙식을 제공하는 곳이

절대 다수이다. 물론 경우에 따라 다르겠지만, 호스텔들에 비해 화장실이나 샤워실이

턱없이 부족하고, 위치도 중앙역 같은 교통의 요지에 자리잡고 있지 못한 곳이 많다.

이용하는 사람들이라고는 당연히 한국인들 뿐이기 때문에 외국인 친구를 사귈 수 있는

기회가 크게 줄어들기도 한다. 해외여행의 맛이란 외국인과의 대화일진데,

민박집에 발을 들여놓는 자체가 해외여행의 메리트를 스스로 깎아내는 일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인민박에 배낭족들이 몰리는 것은,

저러한 이유들보다 훨씬 더 큰 장점들이 있기 때문일 것이다.























민박집에서는 기본적으로 아침식사가 한식으로 나오고, 저녁식사도 제공되는 곳이 많다.

혹자는 외국에 나가서까지 그렇게 밥과 김치를 꼭꼭 챙겨먹어야 하냐는 비판을 하기도 하지만,

집 떠나봐야 부모님 소중한줄을 안다고, 평소에는 거들 떠보지도 않던 밥과 김치가

막상 외국에만 나와보면 그렇게 달콤한 활력소가 되지 않을 수가 없다.

호스텔보다 약간 비싼듯한 숙박비를 오히려 절약할 수 있는 부분이기도 하다.







호스텔에서 외국 배낭족과 스스럼 없는 대화를 나누면야 물론 좋겠지만,

대단히 불행하게도 한국말은 영어와 문법체계가 전혀 달라서

해외어학연수경험이라도 없이는 어릴적부터 십수년을 공부했었도

영어라면 입만 간신히 벙긋벙긋하는 수준의 사람들이 대부분인 것이 사실이다.

리셉션에서 '남자 한명이고, 오늘부터 화요일 아침까지 머물고 싶은데, 도미토리룸으로 빈 자리 있어요?'

라고 말하는 것 부터가 쉽지만은 않은데,

이 와중에 푸른눈에 금발머리들만 잔뜩 몰려있는 라운지에 끼어들어

'내가 프라하에 있었을 때 말이야~'라고 운을 떼며 분위기를 주도해 나가는것은 불가능에 가깝다.

























한인민박은 어떤가?

예약을 위해 전화를 걸때부터 '여보세요'라는 반가운 목소리가 들려온다.

민박집 안으로 들어서보면, 바깥에서 말이 통하지 않아 겪던 숱한 서러움을 토로하고

서로 위로해 줄 수많은 '한국배낭족'들이 온 집안에 몰려있다.

다들 처음보는 사이라서 서먹서먹 할 수도 있겠지만,

'여행',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다음 일정'이라는 강력한 공동의 관심사가 있기에

서로 말을 트게 되는 것도 순식간이다.

여행지의 정보를 얻는것, 동행을 구하는것도 금방이고,

분위기에 따라 밤에는 걸쭉한 술판이 벌어질 수도 있다.

호스텔과는 달리 그 나라에서 연결 할 수 있는 가장 빠른 인터넷 회선과,

사진을 담을 CD라이터를 장착한 컴퓨터가 한대 이상씩은 반드시 준비되어 있으며,

너무나도 당연히 무료로, 다른 배낭족의 눈치만 없다면 얼마든지 사용 할 수 있다.



한인민박은, 온갖 삽질과 두려움으로 가득찬 여행 도중에

초심자들이 마음 편히 긴장을 풀 수 있는 사실상의 유일한 안식처가 되어주고 있는 것이다.





호스텔과 한인민박은, 이렇게 장단점들이 분명하다.

선택은 자유다.

대체적인 비율이 어떤지는 잘 모르겠지만, 구질구질한 한인민박에서는 죽어도 못 있겠다는 사람도 있고,

민박집 놔두고 뭐하러 호스텔로 가서 불편하게 지내냐는 사람도 있다.





















다시 내 이야기로 돌아와서,

드디어 김치를 먹을 때, 여러명의 사람들과 함께 이야기라도 나눠볼 때가 되었다는 생각에

피렌체에서의 숙소는 20일만에 처음으로 한인민박으로 결정봤다.







처음 접하는 민박집의 분위기가 어생하다. 

침대 한켠에서 배낭을 풀며 쭈뼛거리는 내 반대편 저쪽에서는,

여러 남녀 배낭족이 둥그렇게 모여 앉아 캔맥주를 홀짝이며 웃고 떠들고 있다.

'아.. 나도..' 하는 내 눈빛이 그 들과 마주친 순간, 반가운 말이 들려온다.



"이 쪽으로 오셔서 같이 드세요."





"...맥주 되게 먹고 싶었는데 누가 저 안 불러주나 하면서 눈치만 보고 있었어요."

라고 능청을 떨며 자연스럽게 끼어든다.



흡사 고향으로 내려 와서 오랜 친구들을 만난 기분이다.

김치도 맛있고 사람들과도 이상하리만치 쉽게 친해진다.

결국 이틀간의 일정이 끝난 아침, 민박집 아주머니께

'저 생각 바뀌었어요. 이틀 더 있을래요!'라고 말씀 드리는 나를 발견할 수 있었다.



빨리 남부 프랑스로 가서 아비뇽 연극축제도 봐야 하고

에즈니 생폴이니 하는 작은 마을들도 돌아봐야 하는데...

기껏 정성스럽게 짠 루트가 파토나는 이유가 이토록 단순하다.







[이 게시물은 ▶◀ dr.레인님에 의해 2009-04-14 13:19:34 불펜 게시판에서 복사 됨]